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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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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저축의 날’ 국민훈장 목련장 받은 오춘길 대표

“평생 저축습관이 베풀 수 있는 기업인 된 밑거름”

  • 기사입력 : 2014-03-0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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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춘길 대표이사가 공정관리를 지시하고 있다.

    사장실도 없이 사무실 한 켠에서 집무를 한다.

    중장비용 '압축 스프링' 옆에 선 오춘길 대표.


    “자네는 훌륭한 군인이 될 신체적 조건과 기질을 가졌어. 사관학교에 입학하면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훌륭한 장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네.”

    1961~63년 마산공업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다. 하루는 교장선생님이 그를 불러 이렇게 격려해 주었다. 장래가 막연했던 10대 후반의 소년에게 스승의 일깨움은 큰 용기가 됐다.

    끝내 희망했던 장교가 됐고 13년의 군 생활 중 평생습관을 하나 만들었다. ‘쉼없는 저축’이었다. 당시 육군 소위 첫 월급 8560원 중 70%가 넘는 6100원을 떼내 1년짜리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 전역할 때까지 단 한 달도 빠지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저축은 나중에 그가 기업을 일으키는 데 ‘종잣돈’ 역할과 함께 기부를 통해 ‘아너 소사이어티’의 반열에 오르게 하는 영예도 안겨 주었다.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차룡단지 내 (주)현대정밀 오춘길(69) 대표이사.

    기자는 그가 지난해 저축의 날 공로자로 선정돼 저축대상인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는 등 감동인생을 살아온 사실을 경남은행을 통해 우연히 들었다. 쉽게 좌절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큰 교훈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취재를 시도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주변 지인을 통해 수차례 설득했고, 어렵게 수락을 받았다.



    ◆육군장교 첫 월급부터 적금

    일제 강점기인 1944년. 그는 마산합포구 진북면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독한 가난 탓에 여름엔 아이스케키(아이스바) 장사, 겨울엔 국화빵집 직원으로 일하며 야간중학교와 공업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공고 진학 후에는 교장 선생님의 조언대로 장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육군사관학교에 도전했다. 하지만 고배를 마셨다. 성적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혈압이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1966년 8월 갑종장교(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소령으로 예편하기까지 13년간 군 복무를 했다. 비록 장군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푼돈 같았던 군인 월급으로 매달 빠지지 않고 부은 적금은 목돈이 돼 있었다.


    ◆전역 후 제조업 창업

    1978년 10월, 육군 소령 계급을 끝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4월에는 고향 창원에서 기계부품 제조업인 현대정밀을 창업했다. 초창기에는 대개의 창업자들이 그렇듯이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근검절약의 저축습관은 이를 능히 극복하게 해주는 힘이 됐다. 1997년 말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외환 위기에도 끄떡없이 견뎠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은 볼보 건설중장비 부품 제조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 탄탄한 경영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특히 대·중·소형 굴착기에 소요되는 ‘압축 스프링(Tension Spring Assembly)’ 부품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 대기업인 볼보건설기계(세계 7개 공장)에 독점 납품하고 있다.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업체들도 기술력과 공급단가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4가지가 없는 기업’ 경영

    오 대표가 경영하는 현대정밀에는 네 가지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첫째, 청소 직원이 없다. 지금은 연로해 자주는 못 하지만, 오 대표가 출근과 함께 직접 면장갑을 끼고 화장실을 비롯해 여기저기 솔선해서 치운다.

    둘째, 연간 매출액이 한국 300억 원, 중국 100억 원 안팎인 기업인데도 고급 소파와 책상을 갖춘 사장실이 별도로 없다. 업무직원들의 사무공간 한쪽에 책상과 회의용 탁자를 두고 있을 뿐이다.

    셋째, 비정규직이 한 명도 없다.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해 자긍심을 높여 주고 있다.

    넷째, 직원들의 정년이 없다. 본인이 생산성을 낼 수 있는 집중력과 체력이 있는 한 절대로 해고시키지 않는다. 현재 최고령 직원은 대표이사보다 나이가 많은 72세다. 역대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은 나이에 퇴직한 사람은 75세였다. 지난 1997년 “더 이상 힘에 부쳐서 못하겠다”고 자발적으로 퇴사했다.


    ◆직원 복지를 우선하는 중소기업

    근검절약 정신으로 쌓아올린 이윤은 가까운 친지에서부터 직원,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에 아낌없이 베풀겠다는 것이 오 대표의 경영철학이다.

    6남매(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들을 대신해 조카들의 교육과 뒷바라지를 책임졌다.

    직원 사기 진작을 위한 ‘통 큰 베풀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중소기업으로선 보기 드물게 연말이면 빠짐없이 호텔 연회장을 빌려 화합 송년회를 열어 주고, 지난 2005년부터는 대학생·고교생 자녀를 둔 직원에게 연간 각각 600만 원과 200만 원씩을 장학금으로 지원해주고 있다.

    2011년 말부터는 직원들의 주택 구입자금과 생활안정자금을 무이자로 융통해 주기 위한 사내근로복지기금도 만들었다. 2억 원을 출연한 이후 매년 1억 원씩 증자해 현재는 4억 원으로 늘렸다. 2015년까지 5억 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2007년부터는 출산장려금도 주고 있다. 다산 여부를 따지지 않고 초산이라도 50만 원을 지원한다.


    ◆기업이익 사회환원 신념 확고

    오 대표는 운영하는 회사의 규모가 크고 작음을 떠나 이윤이 창출되면 일정부분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다. 그래서 개인소득의 20% 정도, 법인매출액의 1% 정도 사회환원을 실천하고 있다.

    2003년 1월부터 약 10년간 창원시 마산회원구 서마산교회(노인대학)에 매달 100만 원씩 총 1억 원 이상 지원한 것을 비롯해 2011년 1월에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5000만 원을 기부해 경남 7번째, 전국 43번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학창시절 어려웠던 형편이 떠올라 2012년에는 경남미래교육재단에 1억 원을 쾌척했다. 2013년에는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다문화가족에 2000만 원 지원했다. 그외 세계선교사업회(세광교회) 5년간 매년 2000만 원, 경남청소년 K팝 경연대회 지원 2000만 원, 육군본부 부사관 역량강화사업 지원 5년간 매년 3000만 원, 39사단 위문 1000만 원 지원 등 사회기부를 쉼 없이 실천해오고 있다.

    오 대표는 필생의 사업으로 내년년까지 사재 20억~30억 원을 출연해 조그마한 개인 장학재단 설립을 꿈꾸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온 가족이 이해와 동의를 해줬다.

    오 대표의 기부 철학은 확고하다.

    “세상에 자기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부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푼 뒤에는 무한 기쁨이 온다는 사실을, 기부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다만 진정성을 갖고 하는 기부를 곡해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이상목 기자·사진= 전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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