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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 수선지지(首善之地)- 가장 착한 곳

  • 기사입력 : 2013-04-1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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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선지지(首善之地)’란 ‘가장 착한 곳’이란 뜻으로, 본래 서울을 일컫는 말이었다. 한 나라의 서울이란 꼭 인구가 가장 많아야 하는 곳이 아니고, 문화적으로 가장 앞선 곳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 가운데서도 특히 나라의 최고 학부인 국학(國學)을 일컫는다. 가장 착한 곳에서 착한 기운이 퍼져나와 전국으로 퍼져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조선에서는 주로 최고 학부인 성균관(成均館)을 일컬었다.

    성균관은 ‘교화(敎化)의 근원’이라 하여, 전국의 교육, 윤리도덕 강화 등의 총본산(總本山)이었다. 성균관의 지부라 할 수 있는 전국 300개 고을에 향교가 있었는데, 향교도 각 지역에서 수선지지라 했다. 나중에는 서원도 그 기능이 비슷하기 때문에 수선지지라 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특별히 공교육(公敎育)을 중시했다. 조선시대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자격을 갖춘 학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교육을 했다. 관원들도 성균관의 관원이 되는 것을 가장 영예스럽게 생각해 최선을 다해서 교육했다. 퇴계(退溪) 등 대학자들이 모두 성균관의 최고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학문의 주류가 바뀜에 따라 성균관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10년 일본에 나라가 빼앗긴 이후로 경학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총독부 직속으로 두고 제사하는 기능만 남겨 친일 유림들에게 맡겼다.

    1945년 유명한 독립운동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성균관을 다시 회복하여 친일 유림들을 모두 내쫓았다. 그리고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재산을 모아 성균관대학교를 창설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전통을 이은 성균관대학교지만, 국립대학이 되지 못하고 사립대학으로 인가받았다.

    심산 때문에 쫓겨난 친일 유림들은 이승만정권과 결탁하여 1957년 심산 등 민족 유림을 내쫓고 다시 성균관을 차지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입김으로 임명된 성균관대학교 총장은 기독교 신자 이훈구(李勳求)였다. 친일유림들은 아무 경영능력도 없는 데다 또 자기들끼리 계속 싸우다 보니 그 많은 성균관 재산을 다 팔아 없앴다. 돈이 궁하자 성균관에서 성균관대학을 쪼개서 삼성그룹의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 팔아넘겼다.

    기와집 건물 몇 동만 남은 성균관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직원들 월급도 못 주게 되었고, 성균관장이 어디 지방에 다녀오려 해도 여비가 없었다. 그러자 성균관에 부관장 등 각종 직책을 만들어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서 임명했다. 그 돈으로 직원 월급 주고, 운영경비와 관장 판공비로 충당한 것이다. 그러나 자질은 안 되면서 명예욕이 가득한 사람들이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성균관은 더욱 몰락하게 됐다.

    지난 10일 전국 유림의 총수요, 도덕의 마지막 보루라는 성균관장이 공금횡령죄로 구속되는 불행한 사태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어른으로 예절을 이야기하고 인성교육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 구속되는 장면이 전국에 방송됐다.

    성균관장은 억울한 면이 많겠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정말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교화의 근원지’로서 착한 것을 생산해서 전국적으로 확산해야 할 임무를 가진 성균관이 비리의 온상이 되어 왔으니, 국민들의 실망은 엄청나게 클 것으로 생각된다.

    * 首 : 머리 수. * 善 : 착할 선. * 之 : 갈 지. * 地 : 땅 지.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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