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9일 (월)
전체메뉴

[사람속으로] 가곡 예능보유자 조순자 가곡전수관장

‘느린 음악’ 가곡, 천년을 불러온 우리 전통성악이죠

  • 기사입력 : 2013-01-29 01:00:00
  •   
  • 창원시 마산회원구 소재 가곡전수관에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인 조순자 가곡전수관장이 산조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다.
    2007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아양지계(峨洋之契) - 대가들의 만남’ 공연에서 조순자 관장이 정대석 서울대 교수(거문고)의 연주로 평조 이삭대엽 ‘성음은’을 부르고 있다./가곡전수관 제공/



    가곡은 문학성이 높은 시조시에 거문고, 피리, 대금, 장구, 단소 등의 관현반주를 곁들여 부르는 우리의 전통 성악곡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 고향 남쪽바다’, ‘그리운 금강산’ 같은 서양음악 기법에 의해 우리말로 된 노랫말을 가지고 만든 노래를 먼저 떠올린다. 고려시대 노래인 정과정곡(鄭瓜亭曲), 일명 진작(眞勺)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우리 가곡이 1920년대 이후 유입된 서양 가곡에 그 이름을 내어주고만 것이다. 하지만 가곡은 천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넘어 지금도 여전히 불리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된 가곡 예능보유자 조순자 가곡전수관장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보이는 조 관장과 차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았다.



    조 관장은 1944년 서울에서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간이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다가 해방되고 정부수립 후 경찰이 됐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붙잡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조 관장은 1958년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의 국악연구생 2기생으로 선발돼 국비로 국악교육을 받은 뒤 1961년 4월 국립국악원 연구원으로 이적했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궁중의식 중 음악과 춤을 담당하는 기관이던 장악원(일제시대 이왕직아악부로 바뀜) 출신 악사들이 주축이 돼 1951년 설립했다.

    여기서 스승인 소남 이주환 선생을 만났다. 이주환 선생은 이왕직아악부 3기생으로 입소했다. 김영제, 함화진, 최순영 문하에서 아악을 배웠으며, 원래 전공은 피리였으나 하규일 선생에게 가곡, 가사, 시조를 전수받아 일가를 이뤄 20세기 중반 정가 전승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51년 국립국악원 개원과 더불어 초대 원장에 임명됐으며, 국악사양성소장을 겸임하는 등 국악행정 및 교육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어린 마음에 접한 가곡은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엄격했던 이주환 선생의 가르침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느린 음악이라고만 생각했던 가곡이 어느 날부터 좋아지기 시작해 평생의 업이 됐습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전 해인 1964년 일본 요미우리신문사의 초청으로 국립국악원의 첫 해외연주회가 일본에서 열렸다. 국립국악원 단원 중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던 조 관장은 일본 공연에서 가곡·가사를 독창하고, 이주환 선생과 함께 태평가를 부르게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1968년 인천 인화여고 교사로 스카우트된 후 마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신영준 씨를 만나 26살 때 결혼했다. 첫째 아이를 낳고 일과 결혼생활을 병행하며 바쁘게 지내던 중 봉암석산을 운영하던 시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남편이 가업을 물려받게 됐다.

    당시 조 관장 친정은 물론, 주위 사람 모두 마산은 시골이어서 전기도 없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다며 모두 만류했으나 뿌리치고 1970년 남편을 따라 마산에 정착했다.

    “처음 마산에 와서는 말이 안 통해 힘들었어요. 시어머니가 콩기름을 사오라고 해서 사왔는데 알고 보니 콩나물이었고, 대구를 사오라고 했는데 서울에서처럼 창자를 빼고 살만 사와 혼이 나기도 했죠. 시집살이 엄청 했어요.”

    마산에 오자마자 국악교육연구회를 만들어 현직교사들을 대상으로 가곡교육을 했다. 이러한 활동이 알려져 1973년 경남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와 마산교대 음악교육과 학생들에게 국악개론을 가르쳤다.

    “두 대학 학생 모두 서양음악에 대해선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지만 국악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어요. 거문고와 가야금도 구별 못해 사비를 들여 슬라이드를 만들어 국악기에 대해 가르쳤고, 이론과 실기를 병행해야 하기에 라면박스로 장구를 대신했고 비닐우산대로 장구채를 만들기도 했어요.”

    1980년대부터는 특별대우를 받으며 20여 년간 한국교원대학교에 출강했다. 그 외에도 여러 대학에 출강해, 조 관장으로부터 국악을 배운 제자들은 전국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2001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가곡을 사람들에게 쉽게 알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더욱 커졌다. 가곡을 각 나라말로 번역하고 뉴질랜드, 호주,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숱한 해외공연을 통해 가곡을 세계에 알렸다.

    조 관장의 노력 덕분에 가곡은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가 의미하는 것은 인류문화유산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으로 길이 보전돼야 한다는 것이죠. 가곡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세계인의 보편적인 감성을 담고 있어요.”

    조 관장이 후학들에게 가곡을 전수하고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공간인 마산회원구 회원2동 가곡전수관은 국비 4억, 도비 8000만 원, 시비 3억2000만 원 등 모두 8억 원을 들여 2006년 9월 문을 열었다. 이어 2010년 9월 가곡전수관 바로 옆에 국내 최초의 가곡전용연주장 ‘영송헌’이 개관하면서 명실상부한 가곡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가곡이 판소리, 마당놀이, 사물놀이 등 대중적인 요소가 강한 전통예술에 비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정서에 뿌리깊게 내려있는 전통예술인 가곡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뿌리는 생각하지 않고 열매만 보는 것처럼 문화까지도 눈에 보이는 것만 선호한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우리 것을 귀하게 여겨 지킬 수 있어야 중국 동북공정이라든지 일본 역사왜곡에 대처할 수 있는 저력이 생기는데. 내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맞받아칠 수가 있겠습니까.”

    조 관장은 정신을 맑게 하고 차분해진다며 꼭 한번 가곡을 불러볼 것을 권했다. 등을 꼿꼿이 세우는 바른 자세와 들숨과 날숨을 잘 운용하는 호흡법, 바른 소리를 내게 하는 발음법, 음을 변화시키는 기법인 시김새 등을 몸소 체험할 때 가곡에 담긴 철학과 언어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제가 다혈질적인 면이 많은데 가곡을 한 곡 부르면 마음이 가라앉고 관조적이 됩니다. 2003년 경상도에 막대한 피해를 준 ‘매미’가 왔을 때 집에 저 혼자 있었는데 너무 겁이 났어요. 그래서 낱소리 43자를 11분에 걸쳐 부르는 세계에서 가장 느린 성악곡인 ‘이삭대엽’을 부르니 무서운 게 없어지더라구요.”

    그의 바람을 묻자 대뜸 ‘청출어람’이라는 말을 꺼냈다. 자신을 능가하는 후계자가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는 사람이 아니라 가곡입니다. 가곡을 담고 있는 사람은 그릇인데 죽고 나면 깨져요. 다른 그릇에 담아야 하는데 제 그릇보다는 좋은 그릇이 나왔으면 합니다. 아직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수자를 잘 내야 돼요. 대학에서 학위 받고 졸업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부터 혼자 공부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게 만능인 줄 알고 더 정진을 안 합니다. 문화재를 하나의 감투로 알고 있는 것은 참 슬픈 현실이에요. 제대로 해서 물려주고 싶어요.”


    글= 양영석 기자 yys@knnews.co.kr

    사진= 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양영석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