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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 후세자운(後世子雲)- 후세의 자운,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

  • 기사입력 : 2012-07-03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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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漢)나라 학자 양웅(揚雄)이 ‘주역(周易)’을 본받아 ‘태현경(太玄經)’을 지었다. 유흠(劉歆)이 “그 대단한 ‘주역’도 보지 않는데, 누가 ‘태현경’ 보겠소? 뜯어서 간장독 덮는 데 쓰지 않을지 모르겠군요”라고 측은하게 여겼다. 그러나 양웅은 “후세에 반드시 나의 자운(子雲 : 양웅의 자)이 있어 나를 알아줄 것이오”라고 확신했다.

    당(唐)나라 때 와서 대문학가 한유(韓愈)가, 양웅을 유학의 학맥을 이은 인물로 인정해 크게 추앙했다. 오늘날에 와서도 ‘태현경(太玄經)’은 철학자들이 그 가치를 크게 인정하고 있다.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 1917~2000) 선생은 근세 우리나라의 큰 학자였다. 한문학자, 국문학자, 중문학자, 한시인, 서예가, 교육가, 유림지도자 등등 중요한 역할을 했고, 저서를 100권 이상 남겼고, 한시 3000편, 한문문장 3000편을 남겼다. 그러나 옳게 아는 사람이 드물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너나 나나 다 같은 교수’라는 생각을 가졌다. 머리맡에 책 몇 권 놓고 한문 해석 정도 되는 그의 고향 노인들도 ‘이가원이가 서울에서 교수하니까, 그렇지 별 것 있나?’하는 식이었다.

    1967년경에 이가원 선생이 한문시문집 ‘연연야사재문고(淵淵夜思齋文藁)’를 출판했다. 이 책을 읽어본 공자(孔子)의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成) 선생이 이렇게 회답을 보내왔다.

    “‘연연야사재문고’를 읽고서 감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선생의 한문의 조예가 정밀하고 깊은 것은, 비록 우리 중국 고금의 이름난 대가들 속에 두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에 퇴계학연구원(退溪學硏究院) 이동준(李東俊) 이사장이 퇴계학회 지부를 대만에 세우기 위해서 이가원 선생과 함께 방문했다. 대만의 교수 학자들이 40여 명 모여 한시를 짓는데, 대만의 교수가 시를 한 수 지으면, 이가원 선생이 바로 차운(次韻 : 상대방 시의 운자를 그대로 써서 시를 지어 답함)했다. 한두 수 짓고 다 물러나 더 이상 시를 지으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저녁 혼자 지은 시가 50, 60수는 넘었다. 대만의 학자들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대 이후부터 대만의 학자들이 그의 학문적 수준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대륙의 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했는데, 그들도 찬탄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올해 5월 4일 경상대학교에서 연민학국제학술대회(淵民學國際學術大會)를 개최했다. 이때 중국 천진(天津) 남개대학(南開大學) 조계(趙季) 교수는 “연민(淵民)의 한시는 중국 고전시(古典詩)의 법도에 맞는 우수한 작품입니다”라고 극찬을 했다.

    필자는 지난 6월 18일 남개대학 중문과 대학원에 가서, ‘연민 이가원 선생의 인생과 학문’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그리고 연민 선생이 즐겨 시창(詩唱)을 하던 ‘관산융마(關山戎馬)’를 그대로 외워 들려주었다. 젊은 대학원생들이 한국에 이런 대단한 학자가 있었는가 하고 경이로운 눈빛으로 관심을 가졌고, 그 가운데 어떤 학생은 녹음을 해서 벌써 중국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귀중한 보석이 있으면 언젠가는 그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된다. 알아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자기 분야에서 꾸준히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 後 : 뒤 후. * 世 : 인간 세.

    * 子 : 아들 자. * 雲 : 구름 운.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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