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30일 (화)
전체메뉴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1025) 강안양정(江岸兩亭)

- 강가의 두 정자

  • 기사입력 : 2024-04-16 08:08:01
  •   
  • 동방한학연구원장

    서울 한강에 놓인 다리 가운데 강남구 여의도동과 성동구 옥수동(玉水洞)을 연결하는 동호대교(東湖大橋)가 있다. 서울 시내 물을 다 모아 남쪽으로 흐르는 중랑천(中浪川)을 그 부근에서 한강이 흡수하여 수량이 불어나 강폭이 넓어져 호수처럼 보이므로 그 부분의 한강을 동호(東湖)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산과 강이 어우러져 경치가 아주 좋았다. 관원들 가운데서 장래가 촉망되는 신하가 특별휴가를 받아 독서에 전념하던 독서당(讀書堂)이 거기 있었다. 독서당에서 공부한 관원들은 장래 큰 인재로 발탁될 명망을 지니게 되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도 1541년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되었다.

    독서당 옆에는 퇴계와 동시대 인물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소유의 몽뢰정(夢賚亭)이 있었다. 몽뢰정은 그 이후 서울에서 벼슬하다 고향 영남(嶺南)으로 내려가는 관원들의 전송 장소가 되어 더 유명해졌다.

    정유길이 어느 날 꿈속에서 경치 좋은 산속에 가서 마음에 드는 정자를 만났다. 나중에 동호가에서 꿈에서 본 정자와 꼭 같은 정자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로 삼았다. 꿈에 하느님이 내려준 정자라는 뜻으로 몽뢰정(夢賚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몽뢰(夢賚)란 말은, 서경(書經) ‘열명편(說命篇)’에 나오는 말에서 따왔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꿈을 꾸었는데, 훌륭한 정승감을 내려주었다. 꿈속에서 본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천하를 다니며 두루 찾았는데, 바로 유명한 부열(傅說)이란 정승이다.

    정유길은 착하게 관대하게 살았는데, 나중에 자신도 좌의정에 이르고, 그 후손 가운데 정승이 14명이나 배출되어 조선 최고의 명문이 되었다.

    강 남쪽은 압구정동(狎鷗亭洞)인데, 압구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단종(端宗)을 죽이고 세조(世祖)가 되게 한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정자다. 한명회는 사륙신 등 많은 사람을 죽여 공신이 되었고, 최고 관직인 영의정(領議政)을 세 번이나 지냈고, 두 딸을 왕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죽은 뒤 연산군(燕山君) 갑자사화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삭탈관작(削奪官爵)되었다. 그 자손들은 우리 조상이라고 밝히지도 못 하며 숨어 지낸다.

    강을 사이에 둔 두 정자의 주인과 그 후손들의 삶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진다. 착하게 산 사람은 후손들이 번창하나, 간악하게 산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낯을 들고 살 수가 없다.

    1569년 음력 3월 4일 경복궁에서 선조(宣祖) 임금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받은 퇴계선생은, 그 길로 몽뢰정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묶었다. 그때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사암(思庵) 박순(朴淳) 등 많은 학자 관료들이 선생을 전송하기 위해서 한강가로 따라 나와 몽뢰정에서 모시고, 학문과 사상 등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시를 주고받았다.

    몽뢰정은 이때뿐만 아니라 대대로 학자 문인 예술가들의 회합 장소로 잘 활용되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도 만년에 그 부근에서 살며 예술활동을 했다.

    * 江 : 강 강. * 岸 : 물가 언덕 안.

    * 兩 : 두 량. * 亭 : 정자 정.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