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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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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⑦ ‘15세 소년병’ 박차생씨

“나라 지켜야 된다 생각뿐” 어린 학도병 펜 대신 총 잡고 전장으로

  • 기사입력 : 2024-04-03 21: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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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해중 3학년때 친구들과 학도병 입대
    육군통신학교 입교 후 두 달간 훈련
    총 한번 쏴본 적 없이 일산지역 배치
    중공군 참전으로 춘천서 경북까지 후퇴
    지게 지고 이동하는 피란민 행렬에 눈물

    ‘피의 능선’ 강원 양구서 수차례 고지전
    금화전투 중 무릎에 수류탄 파편 맞아
    자대 복귀 후 제대… 고향서 활발한 활동
    “밥 굶던 나라, 경제대국 되는 과정 겪어
    국민들이 역사 제대로 기억해주길”


    “내가 총을 든 이유는 나라가 인민군한테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어. 전사한 친구들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15살 때 학도병으로 참전한 박차생(92)씨는 모교인 진해중학교에 세워진 참전비 앞에서 눈물을 훔쳤다. 1950년 8월 그의 고향 진해는 인민군이 점령하기 직전이었다. 인근 마산에는 인민군과 한미 연합군 사이 마산방어전투가 치러지고 있었고, 진해에서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모두 두려워할 때 어린 나이의 진해중학교 학생들은 펜을 놓고 총을 들었다. 박차생씨는 왜 어린 나이에 총을 들어야 했을까. 70여 년이 지났지만, 그가 본 전쟁은 생생하다. 15살에 전쟁에 뛰어들어 한국 현대사 전체를 경험한 한 영웅 이야기는 취재진도 눈물을 흘리게 했다.

    박차생 6·25 참전유공자가 15살 학도병으로 참전한 강원도 금화(현 김화)지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차생 6·25 참전유공자가 15살 학도병으로 참전한 강원도 금화(현 김화)지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15살에 겪은 전쟁= 전쟁이 터졌던 해 그는 진해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진해 인근 마산에서는 인민군과 한미 연합군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진해에서도 폭탄 소리와 섬광이 보였다. 그와 가족들은 중요한 가재도구는 땅에 묻고 피란을 갈 준비를 했다.

    모두가 전쟁을 두려워했을 때 군 모병관이 진해중학교를 찾았다. “지금이야말로 학도들이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해야 할 때다”고 말하며 학도병을 모집했다. 학생 자치 훈련단체인 학도호국단 소속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자원입대를 결정했다. 학도병들 중에는 당시 제헌 국회의원 아들을 비롯해 집안이 부유한 이가 많았다. 한 반에 5명 정도 자원입대를 신청해 진해중학교에서만 200명이 넘었다. 이 중 체력 훈련을 통과해 입대한 정확한 인원은 207명이다. 이 중 13명은 전사했다.

    그는 같은 동네에서 자라 유독 친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금상효라는 친구는 나랑 정말 친했어. 같이 나라를 구하자고 합심해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휴전이 되고 난 뒤 전사했다는 걸 알았지. 정말 슬펐어. 많이 울었고.”

    가족 곁을 떠난 그는 육군통신학교 1기로 입교해 두 달간 통신병 훈련을 받았다. 훈련 생활은 열악했다. 화장실도 없어 훈련병들은 직접 땅을 파 만들었다. 물도 부족해 바닷물로 양치를 하고 씻었다. 밥에는 배추벌레가 나오고, 양도 적어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훈련병들은 어부들이 잡은 오징어를 훔쳐서 밤에 몰래 뜯어 먹으며 버텼다.

    그는 훈련이 끝난 뒤 5사단 35연대로 배치돼 지금의 일산 지역으로 떠났다. “훈련받을 때 총을 한 번도 쏴 본 적도 없이 전장으로 갔지.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한강을 지나는데 한강 철교가 폭파되면서 미군들이 만든 부교를 지나갔어. 마치 기차가 배처럼 파도를 타는 것 같이 흔들려 정말 신기했어. 어린 나이라 그런지 무척 놀라서 그 기억이 지금도 뚜렷해.”

    박차생 6·25 참전유공자가 15살의 나이에 입대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차생 6·25 참전유공자가 15살의 나이에 입대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피란민 행렬 보고 눈물 쏟아져= 이후 그는 춘천에 배치됐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1951년 1월 초 경북 영주까지 후퇴한다. 그는 후퇴 당시 본 피란민들을 뚜렷이 기억했다. 그가 흘린 눈물에 전쟁의 참상과 아픔이 보였다. 피란민들은 지게에 이불과 식량뿐만 아니라 부모까지 지고 이동했다.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일본제 트럭에는 피란민 재산들이 실렸다. 이동 중 차가 고장 나면 피란 행렬이 멈추기에 차를 계곡에 버리기도 했다. “추운 겨울 날씨에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가면 얼마나 걸어갈 수 있겠나. 결국 아이들을 버리고 가는 부모들도 많았어. 전쟁을 안 겪어 본 사람은 그 참혹한 모습을 상상하지도 못할 거야.”

    이후 서울이 수복되고, 그는 ‘피의 능선’이라 불렸을 정도로 치열했던 양구 773고지로 간다. 1951년 8월부터 9월까지 서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양구읍과 해안분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인민군은 1만5000여명, 국군과 유엔군은 2700여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4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인민군 진지에 하루 평균 3만 발의 포격을 가했다.

    박차생 유공자가 1951년 8~9월 강원도 양구에서 벌어진 ‘피의 능선’ 전투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
    박차생 유공자가 1951년 8~9월 강원도 양구에서 벌어진 ‘피의 능선’ 전투의 지도를 보여주고 있다.

    박씨는 당시 미 2사단으로부터 773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28일 오전 9시에 전투를 나섰다. 그날 폭우가 내렸다. 통신병이었던 그는 빨리 적의 위치를 보고해야 했기에 최전선에서 돌격했다. 여러 차례 뺏고 뺏기는 고지전이 벌어졌다. 중공군들은 피리를 불며 공격했고, 국군은 두려움에 떤 채 막아야 했다.

    “고지를 점령하고 보니 죽은 인민군이 쇠사슬에 묶여 기관총을 잡고 있었어. 이미 부상을 당해서 못 데리고 가니 올라오는 우리들을 기관총으로 쏘라고 묶어 놓은 거지. 그만큼 잔인한 놈들이야. 국군은 어떻게라도 부상병을 데리고 가는데 인민군들은 이렇게 잔인해.”

    그는 전투 중 있었던 미군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773고지에서 전투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부상을 입은 미군 중령을 만났다. 중령은 몸집이 커 한국인 노무자 4명이 들것에 실어 후송하고 있었다. 중령은 후송시켜 달라고 노무자들에게 만년필, 시계 등 뇌물을 줘 가진 거라고는 가족사진 하나뿐이었다. “그 중령이 기억에 남는 게 안 좋은 상황인데도 웃고 있더군. 이제 미국 가서 가족들 만날 수 있다고 하며 가족사진을 내게 보여줬지. 불편한 내색은 전혀 없었어. 정말 유엔군이 고마워.”

    박차생 6·25 참전유공자가 참전중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박차생 6·25 참전유공자가 참전중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1952년 6월 양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다. 야근 근무 중 군사우편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다. 70여년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도 부모님 사진을 머리 아래에 두고 잠을 청한다. 열심히 설명하던 그는 인터뷰 중 잠시 말을 멈추며 눈물을 보였다.

    정전 직전인 1953년 7월 초 그는 강원도 금화(현 김화)지구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고지에서 인민군과 백병전을 벌이다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무릎에 파편을 맞았다. 야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그는 후방으로 후송됐다. 아직 그의 다리에는 파편이 남아있다.

    박차생 유공자가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에 맞은 왼쪽 무릎을 만지고 있다.
    박차생 유공자가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에 맞은 왼쪽 무릎을 만지고 있다.

    “부상 후 아버지가 군 병원으로 바로 올라오셨어. 그때는 병원 앞에 돈을 주면 제대를 시켜주겠다는 브로커들이 많았지. 아버지도 아들 걱정에 은행에서 대출받아 제대시키려고 했는데 내가 막았지. ” 그는 퇴원 후 자대로 복귀했고 이후 1954년 11월 제대 했다.

    박차생 유공자가 모교인 창원시 진해중학교의 한국전쟁 학도병 참전비에 새겨진 전사자와 참전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다.
    박차생 유공자가 모교인 창원시 진해중학교의 한국전쟁 학도병 참전비에 새겨진 전사자와 참전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다.

    ◇나라 지킨, 학도병들 기억해 주길= 그는 제대 후 고향인 진해에 돌아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94년 퇴직 이후에도 진해문화원장, 진해예술촌장을 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일류 보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수류탄으로 부상을 입은 뒤 40년 넘게 후유증이 없었다. 퇴직 후 등산을 하는데 무릎이 아파 정밀 검사를 받으니 파편이 몸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늦게 보훈지청에 보상받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견뎌 보라. 예산이 없다”는 답변이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까지 준비했지만, 다행히 2011년 7급 상이 판정을 받았다. 58년 만이다.

    “난 정말 행복해. 밥 굶을 걱정했던 이 나라가 경제 대국이 될 때까지 모든 과정을 겪었어. 전쟁, 군사정권, 민주정권 전부 다 경험했어. 어린 학도병들이 총을 들고 전쟁에 뛰어든 것, 이 나라가 어떻게 지켜졌는지 국민들이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 주는 게 마지막 부탁이야.”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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