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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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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⑥ ‘행정병’ 권영대씨

펜 들고 행정병으로… 전장 누볐다, 이젠 전우 복지 위해… 현장 누빈다

  • 기사입력 : 2024-03-20 21: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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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년 마산공고 다니다 영장 받고 입대
    제주서 훈련 후 격전지 금화지구 배치

    부대 유일 고학력자로 행정병에 뽑혀
    병력 충원, 글 모르는 병사 소속·군번 작성

    서류 지키려 나무 사과통 위에서 업무
    휴전 후엔 전북 무주서 무장공비 토벌도

    은퇴 이후 유공자회 창원지회장 맡아
    전우 복지 증진, 학교 안보 강연 등 앞장

    “정부의 제대로 된 보훈 정책 없다면
    목숨 걸고 나라 지킬 젊은이 없을 것”


    “나는 행정병 출신이라 솔직히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크게 싸운 일도 없어. 그래도 나의 전우들, 참전유공자들이 남은 삶 동안 좀 더 편안히, 대접받게 살 수 있게끔 노력 중이야.”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인 권영대(92)씨는 고령에도 뚜렷이 이같이 말했다. 그간 6·25전쟁을 말할 때 전투 병과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서 행정병이나, 취사병 등의 이야기는 듣기 어려웠다. 본지가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기획을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6·25전쟁 때 소총을 들었든 펜을 들었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은 같았다. 모두 ‘참전 영웅’이다. 행정병으로 전쟁에 뛰어들었고, 현재는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영대씨는 그간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이 5사단 행정병으로 참전한 강원도 금화지구 고지전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이 5사단 행정병으로 참전한 강원도 금화지구 고지전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배운 한자 덕에 행정병으로= 권영대씨는 1952년 11월 마산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입대 영장을 받았다. 군에 가야 해 고등학교 졸업장은 받지 못 했다.

    당시 훈련소가 있던 제주도에서 신병 교육 96일, 하사관 교육을 두 달 받았다. 짧은 기간에 병사를 육성해야 하니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훈련병들은 매일 새벽 구보를 하고, 교육장에서 훈련을 받았다. 들판에 천막을 세워 만들어진 간이 교육장이라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식사는 세끼 다 나왔지만, 반찬 없이 국과 밥뿐이었다.

    “전쟁 때 하사관은 지금으로 치면 상병이었어. 병력이 없으니깐 많은 훈련병들이 하사관 교육을 받고 전방으로 배치돼 분대장을 맡았지. 제주도 훈련소가 정말 열악했는데, 밥도 조금밖에 안 줘 다들 말라 있었지.”

    훈련이 끝나고 5사단에 배치되어 강원도 금화(현 김화)지구로 이동했다. 당시 금화지구에는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금화지구전투는 최대 격전지인 강원도 철의 삼각지(철원·금화·평강) 중 하나로 중부 전선 핵심 요충지였다. 금화지구를 뺏기면 중부 전선 장악이 어려웠기 때문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권씨는 고등학교 재학 중 군에 갔기에 부대 내 고학력자였다. 당시 대부분 군 문서는 한자로 작성됐다. 이 탓에 유일하게 한자를 잘 아는 그는 행정병으로 뽑혔다. 수십 년이 지난 후 확인해 보니 그는 소총수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중대에 행정병 자리가 없었는데 임의로 만든 것 같다고 그는 추측했다.

    권영대 지회장은 행정병으로 참전했지만, 소총수로 기록됐다. 그는 자신이 한자를 잘 알아 군에서 임의로 행정병 자리를 만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권영대 지회장은 행정병으로 참전했지만, 소총수로 기록됐다. 그는 자신이 한자를 잘 알아 군에서 임의로 행정병 자리를 만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전투 중 손실 난 병력을 충원시켜 주는 것이었다. 휴전이 된 1953년 7월 27일까지 땅 한 뼘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지에서 많은 병사들이 전사하다 보니 신병으로 충원시켜야 했는데 병력이 없는 일이 잦았다.

    “일등병들이 오면 대다수가 글을 몰라 자기 소속, 군번을 못 썼어. 그런 애들이 절반이 넘었지. 그들을 대신해 내가 다 써줬어. 얼마나 먹고 자는 게 시원찮았는지 일등병들은 전부 다 죽을상이었어. 애들 표정을 보면 넋이 빠져 있어 참 불쌍했지.”

    하루에 한 번 아침에 고지를 지키는 병사들을 위해 주먹밥이 배달됐다. 배달은 40대가 넘는 보급대원들이 맡았다. 배달될 때 아침, 점심, 저녁때 먹을 세 개의 주먹밥이 한 번에 전달됐다. 병사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 하고 한 번에 다 먹어 치웠다. 식수도 부족해 미군 부대 기름통(20ℓ) 하나 고지에 보냈다. 고지에는 40명 정도 병사가 있었다. 병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이기고, 올라오는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야 했다.

    “병사들 보면 얼굴은 죽을상이고, 옷도 다 찢겼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거지로 보였을 정도로. 행정병들도 나무 사과 통 위에서 업무를 봤지. 적이 쳐들어오면 서류 다 담아서 바로 도망가야 했으니까.”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이 지리산 일대에서 마지막 빨치산으로 활동한 정순덕을 기록한 책 ‘실록 정순덕’을 보며 그 당시를 떠올리고 있다.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이 지리산 일대에서 마지막 빨치산으로 활동한 정순덕을 기록한 책 ‘실록 정순덕’을 보며 그 당시를 떠올리고 있다.

    ◇휴전 이후에도 계속된 전쟁= 그는 휴전 소식을 화천군 금화지구에서 들었다. 휴전이 됐다는 라디오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치열하게 싸웠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후 그는 후방에서 훈련받고, 지리산과 덕유산에 숨어있던 무장 공비 토벌을 위해 전북 무주로 내려간다.

    전쟁이 끝났지만 남한 곳곳에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은 무장한 채 남아 있었다. 이들은 산에 숨어 살며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는 무장공비들이 전투력과 위장술이 강했다고 떠올렸다. 공비들은 민가에 내려와 돼지와 식량 등 먹을 것이면 무조건 가져갔다. 경찰이 온다고 하면 공비들은 싸우고, 군인들이 온다면 다시 산으로 도망갔다고 그는 설명했다.

    “공비를 붙잡아 심문해 어떻게 버텼는지 들은 적이 있어. 비상용으로 양말에다 쌀을 넣고 다니는데 도망치다 배고프면 그 양말을 물웅덩이에 넣고 불려서 땅을 파 불을 때 해 먹는다고 하더군. 생존력이 그만큼 강한 거지. 정말 독한 놈들이야. 나중에 무장공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너무 궁금해 책을 사서 읽어 본 적도 있어.”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

    ◇자유 대한민국 지킨 공로 보답해줘야= 1957년 제대 후 그는 고향 마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운수사업과 주유소를 경영하면서 가정을 이끌었다. 은퇴 이후 2019년부터는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을 맡아 전우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요즘도 매일 고령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요즘 그가 제일 관심 가지고 노력하는 것은 참전명예수당과 안보 교육이다.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김승권 기자/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김승권 기자/

    도내 17개 시·군에서 지급하는 국가유공자 수당은 각 지자체별로 상이하다. 지난해 5월 기준 참전명예수당은 18만~10만원 선, 보훈명예수당은 10만~5만원 선에서 각각 결정해 지급했다. 그가 있는 창원시는 각 10만원, 5만원으로 수당이 가장 적었는데 올해 3만원이 인상됐다.

    그는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교까지 안보 강연을 나가고 있다. 힘이 들지만 미래 세대들이 전쟁을 겪지 않으려면 참전 영웅들이 나서 가르쳐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6·25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정말 고생했어. 지금은 상상도 못 할 거야. 근데 정작 국민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알려고 하지도 않고. 학교 가서 아이들한테 주먹밥 먹으면서 배고픔을 참고 싸웠다고 이야기하면 ‘라면 먹으면 되지’ 이렇게 말해. 정말 눈물 나도록 섭섭해.”

    그는 매달 창원시 성산구에 있는 6·25참전 기념비를 찾아 청소를 한다. 처음 그가 그곳을 갔을 때는 안내 표지판도 없고 깃발도 찢겨 있었다. 기념비의 모습이 마치 참전 영웅들을 대하는 것 같아 그와 지회 회원들은 직접 깃발을 수리하고, 청소했다.

    올해는 경남에 있는 두산에너빌리티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공장 등을 전우들과 방문해 본인들이 지킨 나라가 세계 최고 제품을 만들고 있는 현장을 볼 계획도 하고 있다.

    영웅은 제대로 된 보훈 정책이 이뤄지지 않으면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킬 젊은이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6·25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졌으면, 지금 선진국의 모습일 것 같아? TV에 나오는 삐쩍 마른 북한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가 될 수도 있었어. 그런데도 수당 조금 올려 달라고 하면 다들 말을 돌리고, 예산이 없다고 해. 젊은 사람들 실업급여 주고, 수당 다 주고 하는데 우리한테 줄 돈은 없다고 해. 수당은 우리가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아주 작은 보상 중 하나인데도. 지금 젊은 군인들이 푸대접받는 참전 영웅들을 보면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킬까? 크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야.”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
    권영대 6·25참전유공자회 창원지회장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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