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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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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인연들- 진서윤 시인(2013년 경남신문 시 당선)

  • 기사입력 : 2024-02-15 19:4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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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해 친구의 등장은 내가 오랜 시간 어렵사리 쟁여온 시에 대한 상식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궁핍이 일상이었던 가정형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놀이문화로 책을 좋아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여고 시절 문예부 활동까지 이어졌다. 사는 일에 경제적 측면이 때로 타인에 의해 평가절하되기도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타진했던 나는 생계를 제1순위로 두고 여고 졸업 후 공무원의 길을 택했다. 친구는 대학 졸업 후 부천에서 수학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방학을 맞아 잠시 마산 친정에 온 김에 우리 집에 들른 거였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막 발간된 첫 시집과 함께 왔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시 이야기로 흘렀고, 두어 달 전에 경남 여성 백일장 장원 상을 받은 나의 근황도 곁들였다. 내 글을 보고 싶어 했던 친구를 위해 블로그를 열었을 때 실망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시 공부에 도움 주신 분께 냉정한 평가를 받아보자고 했다. “서정이 동강처럼 장엄하게 흐르는군요. 문장도 좋아요. 이 정도면 시라고 내놓아도 별문제가 없겠어요. 하지만 현대성의 문제를 따지면 이 유장한 가락은 낡았다고 할 수 있죠. 말을 우아하게 다듬는 솜씨는 있으나 시인 나름의 정신과 형식이 없어요.” 문학기행 중에 쓴 ‘청령포에서’의 글 아래 매우 조심스럽게 댓글로 남겨져 있었다.

    “오 선생 친구분, 시 공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라는 말은 그분이 친구에게 진심으로 남긴 충고였다. 그리고 여과 없이 내게 전해졌다. 어디에 기대서 나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내가 습득하고 있었던 시적 이론은 해체되어 버렸고, 그리하여 그 말은 이후 1년 넘게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충격이자 두려움으로 나를 지배했다. 암담했던 나는 한동안 자격증 공부와 일에만 매달렸다. 그것들은 어수선한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또 다른 역할을 했다. 그러다 직장에서 평택으로 발령이 났을 때 아는 이 없는 낯선 도시의 숙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여전히 글 쓰고 책 읽는 도리밖에 없었다. 전입한 부서에서 막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기 시작할 무렵 그분의 타계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알았다. 친구에게 연락했을 때 본인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라 장례식장 가는 길이라면서 당장 그가 대표로 있던 출판사와 남은 가족 걱정을 했다. 그가 겪었을 외로움이 호봉이 올라도 여전히 대출이자에 허덕여야 했던 내 통장 명세와 겹쳐 그날 밤엔 나도 소리 죽여 한참을 울어야 했다. 전통적 표현대로라면 내 업력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글쓰기에 몰입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해 12월 경남신문사로부터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갔지만 문청을 위한 그의 애정 어린 일갈은 오래 기억에 남아 스스로 방향 표지판을 통과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리고 올해 1월 그가 세웠던 출판사에서 나의 첫 시집 〈여기까지가 인연입니다〉를 출간했다.

    진서윤 시인(2013년 경남신문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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