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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훌리건 유권자는 민주주의의 적- 이재달(심산서울병원 부이사장·전 MBC경남 국장)

  • 기사입력 : 2023-08-23 19: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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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의 교과서라는 미국부터 그렇다. 지난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한 트럼프가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폭도로 변했다. 이들은 바이든 당선인에 대한 의회의 대통령 인준을 막기 위해 2021년 1월 6일 의사당에 난입해서 하원의장 사무실과 상원의장 의장석을 점거했다. 이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었으며, 세계의 민주시민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아름다운 경선을 봐왔던 사람들은 이를 통해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느꼈다.

    착실하게 진전하던 한국의 민주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 어떤 민주국가에 비해서도 위기 상황이다. 특정 진영과 정치인의 광적인 팬덤에 의해 근본부터 허물어지는 모습이다. 팬덤은 자신의 지지 정치인을 비판하면 테러 수준의 협박을 하며 달려든다. 대표적으로 ‘개딸’을 들 수 있다. 개딸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는 든든한 우군이다. 따라서 ‘친명’ 측은 개딸이 강력한 지지층이어서, ‘반명’ 측은 이들의 테러가 두려워서 부지불식간에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토론과 건전한 비판이 이뤄지지 못한다. 민주국가는 상대 진영과의 활발한 토론과 상호 비판을 통해 정답을 찾아가는데, 팬덤은 이를 방해하는 반민주 세력이 돼 버렸다.

    좌우 진영 대결에서도 팬덤은 민주주의 방식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상대를 향하는 말은 정상적인 사람의 언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섬뜩하고 소름이 돋는, 날 선 말이 일상적이다.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린 마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팬덤 유권자를 미국 조지타운대학의 제이슨 부레넌 교수는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는 저서에서 훌리건(hooligan) 유권자라고 이름 붙였다. 훌리건은 정치의 광적인 팬이다. 확고한 세계관을 갖고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주장하지만, 편향된 방식으로 정치 정보를 소비한다.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정보를 찾고, 자신의 의견과 모순되거나 확증하지 못하는 증거는 무시한다. 훌리건은 대안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어리석고 사악하다고 생각하면서 심지어 경멸까지 한다. 내 편의 생각과 다르면 물불을 가리지 않아 정치를 저질화시키는데도 투표권을 꾸준히 행사하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한편, 훌리건과는 달리 민주주의에 이상적인 유권자 유형으로 벌컨(vulcan)형을 들고 있다. 벌컨은 SF 시리즈 ‘스타트렉’에 나오는 논리적이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외계 종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인데, 정치를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유형이다. 정치에 관심이 크면서도 편향되고 비합리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냉정함을 지닌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멍청하다거나 사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안과 관련해 상대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유권자다.

    문제는 이러한 벌컨형의 유권자가 소수여서 정치판의 주류로 행세하지 못하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미디어와 인터넷 등의 영향으로 훌리건은 갈수록 더 나쁜 훌리건으로 변하고, 벌컨형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쁜 유권자가 증가하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강화되면서 진영 간 강경 대결과 비민주적 퇴행으로 정치가 저질화되고 있다.

    특히 몇 달 남지 않은 내년 4월의 총선이 다가올수록 국민과 미래보다는 선거를 염두에 두고 팬덤에 기대는 정치인이 늘고 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작금의 정치 풍토에 많은 유권자가 위기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나쁜 정치는 결코 정치인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훌리건 같은 나쁜 유권자가 있기에 나쁜 정치가 만들어진다. 정치판을 쇄신하려면 무엇보다 유권자가 벌컨형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재달(심산서울병원 부이사장·전 MBC경남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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