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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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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ON- 트렌드] 가성비 넘어 ‘시(時)성비’ 시대 “1초도 아깝다”

도입부 0초, 10초 건너뛰기, 1.5배속, 드라마 요약보기

  • 기사입력 : 2023-07-06 20: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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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날짜와 시간의 기준이 되는 달력(CALENDAR)의 어원에서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캘린더는 로마에서 쓰던 장부(KALENDARIUM 또는 CALENDARIUM)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빚에 대한 이자는 매월 초하루(KALENDS)에 갚는다는 것이 관례였다.

    ‘정보’와 ‘부(富)’의 쏠림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의 중요성이 각광받고 있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와 ‘가심비’(가격 대비 만족도)를 넘어 시간 대비 성능을 중시하는 ‘시(時)성비’라는 신조어가 파생됐다.



    과도한 경쟁시대 ‘시간 대비 성능’ 중요시
    日, 굽는 카레·0초 라멘 등 간편 조리 인기
    가요에서도 도입부 0초인 노래까지 등장


    ◇2022년 일본 신조어 1위 ‘타이파’= 지난해 일본에서는 시간 대비 퍼포먼스를 뜻하는 ‘타이파’가 신조어 1위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간편조리세트(밀키트)와 가정간편식(HMR)의 보급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됐다. 일본인들이 즐겨 먹는 카레는 냄비에 끓이는 전통 조리법 대신 프라이팬에 굽는 제품의 점유율이 10% 이상 늘었다. 굽는 카레는 조리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0초 라멘’은 시성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상품이다. 이름 그대로 봉지를 뜯자마자 먹을 수 있는 일본의 라면인데, 닛세이식품이 출시하자마자 매진되며 젊은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본의 시성비 문화는 가요에서도 알 수 있다. 2021년 20대 일본 히트곡의 도입부는 평균 6.3초로, 10년 새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심지어 도입부가 0초인 노래도 등장했다. 전주 없이 노래가 바로 재생된다. 전문가들은 정기구독형으로 음악을 듣는 플랫폼이 생기면서 대중의 귀를 사로잡으려 작곡가들이 도입부 없이 바로 노래가 나오도록 만든다고 분석했다.


    한 콘텐츠에 긴 시간 할애하는 것 꺼려
    짧은 시간 더 많은 콘텐츠 시청 추구
    드라마·영화도 요약본으로 10분 안팎 시청


    ◇효율 중시하는 MZ에 안성맞춤= 10대, 20대뿐 아니라 기성세대까지 전통 검색 플랫폼인 네이버, 구글, 다음이 아닌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를 비롯해 인스타그램, 틱톡 등을 정보 탐색(검색)의 용도로 활용하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특히 MZ세대에게 하나의 콘텐츠에 긴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진다. 창원시 성산구에 사는 조은별씨의 유튜브 재생 속도는 1.5배로 설정돼 있다. 조씨는 “처음엔 영상을 볼 때 빠른 감이 있었는데 보다 보니 익숙해져서 1배속 영상을 보면 답답함을 느낀다. 이제는 지루한 부분은 화면 오른쪽 분할을 눌러 ‘10초 건너뛰기’로 영상을 넘긴다. 이렇게 시청하면 시간이 절약되고 더 많은 콘텐츠를 볼 수 있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사는 강은미씨는 최근 10분 안팎으로 드라마를 훑어본다. 강씨는 “100일된 아기를 키우느라 최신 드라마나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다. 1편을 다 볼 시간이 없어 요약본을 보게 됐는데, 핵심 장면은 다 볼 수 있으면서 시간은 아낄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창원에 사는 직장인 이모씨는 퇴근하면서 배달 앱을 열어 저녁식사를 주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씨는 “식당에 오가는 시간, 음식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배달앱을 사용하게 됐다. 집에 도착하면 현관에 음식이 도착해 있어 바로 먹을 수 있으니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경은= 입시와 취업 등 과도한 경쟁을 겪는 젊은 세대에게 시간을 쪼개는 방식은 이미 몸에 밴 일상이 됐다.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공부하기 위해 인강(인터넷강의)을 배속으로 본 것처럼 시간 대비 효율성을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조씨는 “학교 다닐 때나 취업 준비를 할 때 인터넷 강의를 배속으로 본 게 익숙해진 영향인 듯하다. 시험과 직결되는 동영상 강의도 배속으로 봤는데 유튜브 영상을 빠른 속도로 보는 건 이미 ‘국룰’(국민적 규칙)이 된 것 같다”며 웃었다.

    쉽게 흥미를 잃는 MZ세대의 특징으로 보기도 한다. 강씨는 “시간이 있을 때도 영상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 10초 건너뛰기를 누르곤 한다”며 “1시간짜리 드라마는 지루하게 여겨져 온전히 못 보는데 수십 초짜리 ‘숏폼’은 1시간 동안 볼 수 있다. 유용하게 시간을 사용한 듯하지만 따져보면 흥미를 금방 잃고 집중력이 예전보다 떨어져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시간의 효율적 활용 측면서는 긍정 평가
    짧은 시간 강한 자극 ‘도파민 중독’ 우려도
    전문가 “균형감 있게 디지털 활용하기를”


    ◇‘도파민 중독’ 비판도= 요즘 세대는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고 정보 처리능력도 예전보다 좋아졌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이용하고 시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점에서 ‘시성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반면,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 강한 자극을 얻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쉽게 따분해하고 새로운 자극을 찾는 이들 가운데 ‘도파민 중독’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도파민(Dopamine)은 중추신경계 신경전달물질을 의미하는데, ‘행복 호르몬’이라 불릴 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당히 자극하면 즐겁지만 즉각적인 자극이 심하면 몸에 해롭다. 약물이나 게임 등에 중독된 사람의 경우 도파민 분비량이 급속히 늘어나기도 한다. 이는 중독과 과몰입의 단초가 된다.

    숏폼 영상을 연달아 시청하고 새로운 게시글을 위해 화면을 새로고침하는 등도 도파민 중독의 한 현상이다. 점점 빈도와 강도가 세져야 더 많은 도파민을 느낄 수 있어 오히려 일상에 피로를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도파민 중독에 대한 자성을 방증하듯 인터랙티브 웹 플랫폼 메타브에서 출시한 도파민 중독 테스트가 SNS를 중심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이를 자각한 이들을 중심으로 최근엔 ‘도파민 디톡스’가 늘고 있다. 도파민 디톡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소셜미디어 노출이 잦은 IT 종사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졌다. 강씨는 “커뮤니티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 다큐 감상 등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평온을 찾는 이들의 후기를 보고 따라해봤는데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시도해보니 점점 휴대전화를 놓고 다른 일을 해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어떤 기량을 쌓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 투입과 인내가 필요한 때도 있다”며 “‘시성비’로 해결할 수 없는 과업들도 있는 만큼 균형감 있게 (디지털 기술 발전의) 장점을 취하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민주 기자 jo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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