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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4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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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구지약갈(求知若渴)- 아는 것을 구하기를 목마르듯이 한다

  • 기사입력 : 2012-07-1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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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모의 좋은 뒷받침을 받아 좋은 학교를 나와 큰 학자가 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지식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큰 학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은 자기 하기 나름인데, 관건은 알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어야 한다.

    지난번에 소개한 한학 대가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과 동시대에 연민 못지않은 대가가 있었으니, 바로 방은(放隱) 성낙훈(成樂熏 : 1911~1976) 선생이다. 방은은 호이고, 자는 자목(子沐)이다. 특히 박학다식한 것으로는 연민 선생보다 더 유명하다. 연민과 마찬가지로 정식으로 학교를 안 다니고, 대학교수가 된 분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대대로 함안군(咸安郡) 산인면(山仁面) 부봉리(釜峯里) 삼발에서 살았다. 필자가 어릴 때 함안 노인들 사이에 삼대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성낙훈이 대학교수 된 것”이 들어간다.

    성낙훈 선생은 어려서부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으나, 가난하여 책을 마음대로 보지 못하고 산에 나무하러 다녔다. 어느 날 산에 올라가 먼 데를 바라보며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화물차에서 큰 짐뭉치가 하나 떨어졌다. 꿈에도 그리던 옛날 책이었다. 그때부터 밤을 새워 가며 읽었다. 워낙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면 다 안다고 했다.

    장래가 촉망되니까, 그 얼마 뒤 재력 있는 친척이 대구 대륜학교(大倫學校)에 보내 주었으나, 수업을 들어보고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한 학기 마치고 그만두고 와 버렸다. 또 일본에 유학을 보내주었으나 역시 배울 것이 없다고 돌아와 버렸다. 한학자로는 드물게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19세 때 벌써 금강산(金剛山) 유점사(踰岾寺) 강원(講院)에서 불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일제 때는 그냥 직업 없이 공부만 하고 지내다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이병도(李丙燾), 윤리과의 김두헌(金斗憲) 교수 등의 자료 정리 등을 도와주었다. 이병도 교수가 워낙 많이 일을 시켜 미안하니까, 1948년에 서울대학교 중문학과 조교가 되게 해 주었다. 학력도 없고 사투리가 심하여 알아들을 수 없고 불친절하다 하여, 학생들이 조교에서 내쫓으려고 계획을 하였다. 얼마 지나다 보니, 경성제대(京城帝大)나 북경대학(北京大學) 나온 중문과 교수들한테 물어보면 모르는 것을 조교에게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없기에 그 실력에 탄복하여 그냥 두었다고 한다. 그 뒤 6·25전쟁 직전에 김두헌 교수가 전북대학교 총장으로 가면서 데려가 사학과 조교수로 임용하였다.

    전북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를 겸직하였고, 그 뒤 경북대학교 교수를 지내고 다시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가 정년이 되기 전에 퇴임하여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 교열위원(校閱委員), 국역연수원(國譯硏修院) 교수 등을 지내며, 많은 젊은 한문인재를 배양하였다.

    학교를 안 다녀도 한글로 논문도 쓰고, ‘한국당쟁사(韓國黨爭史)’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 ‘한국유교사상사(韓國儒敎思想史)’ 등의 무게 있는 저서를 남겼다. 성낙훈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워 대학교수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 求 : 구할 구. * 知 : 알 지. * 若 : 같을 약. * 渴 : 목마를 갈.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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