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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롯데자이언츠 출신 박용성 김해 ‘삼영 하이텍’ 대표

왕년의 홈런타자 박용성, 기업인 '성공'

  • 기사입력 : 2012-05-2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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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용성씨가 팬이 보내준 스크랩북을 보여주며 당시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있다.





    박용성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누가 떠오르는가.

    두산그룹 부회장 출신이며 현재 대한체육회장인

    박용성씨를 떠올릴 수도 있고,

    프로야구를 원년(1982년)부터 좋아했다면 또 다른 박용성씨가 생각날 것이다.

    마산야구장 첫 홈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고 누군지 떠올릴 수 있다면 프로야구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주인공은 역시 앞서 언급했던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창단멤버인 박용성(54·삼영 하이텍 대표)씨다.


    ◆프로야구 원년 ‘후반기 홈런왕’

    박용성씨는 프로 출범 한 해 전인 1981년 실업팀인 한일은행에서 뛰다가 프로야구 출범 이후 연고지 롯데 구단의 지역연고선수로 지명됐다. 그는 동아대에서 외야수로 활약하며 대학선발과 국가대표까지 지냈던 만큼 롯데의 외야를 책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프로 출범 직전인 1982년 1월 동계훈련에서 경남고 투수인 조용철의 공에 맞아 왼쪽 손목이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는 바람에 전반기가 끝날 무렵 프로야구 무대에 등장한다.

    골절상으로 동계훈련도 거의 못했지만, 후반기에 홈런 11개를 몰아치며 강타자로 팬들의 기억 속에 깊게 남았다. 박씨의 활약에 언론에서는 ‘후반기 홈런왕’이라는 비공식 타이틀까지 붙이며 새로운 거인의 등장을 반겼다.

    프로 첫해 성적은 타율 2할8푼7리, 11홈런, 38타점(52경기 출전)이었다. 이듬해는 타율 2할8푼7리, 17홈런, 63타점(97경기 출전)으로 프로 데뷔 이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박씨는 1983년이 황금기가 아니었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그는 “사실 그때도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죠”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하지만 결국 중학교 때부터 찾아온 어깨 부상으로 1984년부터는 부진을 거듭했다. 그래도 그는 그해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지명타자로 출전해, 김시진(현 넥센 히어로즈 감독)을 상대로 2점 홈런을 쏘아 올리며 상대적인 전력 열세로 분류됐던 롯데가 우승하는 데 기여하며 ‘해결사’ 본능을 과시했다.

    ‘후반기 홈런왕’으로 불릴 만큼 강타자였지만 부상이 누적되면서 불과 7시즌 만에 은퇴를 하고 만다. 그 7시즌 중에도 단 한 시즌도 전 경기 출전을 못했다는 아쉬움도 남아 있다. 지금처럼 재활프로그램이 잘 갖춰져 있었다면 박씨의 선수생활을 훨씬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

    박용성씨는 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투수로 활약했다. 마산동중에 입학한 이후 운동장에서 야구부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매료된 것이 계기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 5월이 돼서야 공을 잡을 수 있었다. 몸이 약했던 탓에 1년에 3~4개월은 운동을 쉬어야 했고, 투수로 시작했지만 어깨 부상으로 마산상고(현 용마고) 진학 이후에는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박씨는 동아대 재학 시절 1학년 때 경기에 몇 번 출전하지도 못했다. 그는 그때까지 야구밖에 몰랐지만 포기할까라는 고민도 많이 했었다.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는 새롭게 야구에 눈을 뜨게 된다. 동계훈련 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면서 강 감독의 눈에 띄면서 그의 진가가 드러나게 된다.

    “10월부터 동계훈련에 들어갔어요. 그래도 연습이나 해 보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스승을 잘 만난 거죠. 강 감독님께 치는 법 등을 배우면서 야구에 눈을 떴어요”라며 스승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박씨는 대학 3학년 때인 1979년 한·미대학선수권대회 대학선발을 하고 1980년 니카과라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프로 출범 직전에 겪었던 부상은 그에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다. 운동을 쉬면서 투수와 야수의 스타일을 분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어북에 메모를 하면서 상대 투수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공을 던지는지 끊임없이 자료를 만들어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후반기 11홈런이라는 ‘깜짝 활약’ 속에는 이러한 노력이 숨어 있었다.

    박씨는 “실제 큰 성적을 내진 못했다. 팀의 숨은 일꾼으로 드러나지 않게 서포트를 했을 뿐”이라며 자신을 낮춰서 평가했다.



    ◆기업가로 새출발

    1987년과 1988년은 박용성씨의 야구 인생에서 마지막 시기였다. 2년을 합쳐 1군에서 12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고, 1군과 2군을 오락가락했다. 1988년에는 2군에서 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 씨는 “의욕은 넘치지만 몸이 안 따라주니까 시합하러 가는 것이 고문이었다”고 밝혔다.

    박씨는 선수협 파동 등을 겪으며 1988년 유니폼을 벗는다. 통산 359경기 출전 2할5푼8리의 타율, 43홈런, 145타점을 남긴 채.

    그는 미래를 고민하다가 미국 야구 유학을 준비했다. 하지만 미국 취업비자 발급에 6개월이 소요됐다. 그때 창원에서 공장일을 하던 장인을 도우면서 결국 미국으로 떠나지 못하고 기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 어릴 때부터 야구만 하다 보니 처음에는 적응이 안 돼서 당시 75㎏이었던 몸무게가 61㎏까지 내려갈 만큼 많은 고생을 했다.

    플라스틱 사출 성형 업체를 운영하는 장인과 처남 일을 도우면서 2007년 ‘삼영 하이텍’이라는 본인 명의의 사업체를 만들어 현재 김해 진례면에서 운영하고 있다. 처남 일도 돕다 보니 사업을 키울 수 없어 지난해부터 자신의 업체 운영에 전념, 용접봉을 감는 부품(스풀) 생산을 하고 있다. 올해 매출 목표는 20억원 수준. 박씨는 내년에 30억원 수준으로 키우고, 수출도 하면 연간 30억~40억원 이상 매출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 현재 전량수입하는 주사기 바늘 대용품 기술개발에 나설 계획이다.

    박씨는 “40대 초반에 사업을 시작해서 중반에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야 하는데 사업 시작이 너무 늦었다”며 “올해 지나면 사업이 안정될 것으로 보이고, 매출 위주보다는 실속 위주로 성장시킬 계획이다”고 강조했다.

    박씨는 선수 시절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으로부터 타격폼을 바꿔보라는 조언을 받았다. 고집이 셌던 그는 스승의 조언에도 쉽게 타격폼이 고쳐지지 않는다며 원래 타격폼을 유지하면서 1986년 1할대로 타율이 추락했다. 선수생활 중 가장 후회스러운 일로 강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점을 꼽은 그는 사업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박씨의 사회생활은 ‘페어플레이’로 요약된다. 사회 생활에서는 페어플레이를 하며 회사일은 스포츠맨십을 적용해, 접대로 매출을 확장하기보다는 기술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로야구 제9구단 NC다이노스에 대한 기대도 숨기지 않았다. 박씨는 “김택진 구단주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김경문 감독이 화합된 선수 분위기를 만드는 만큼 선수 수급에 신경 쓴다면 내년에 돌풍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내년부터 NC와 롯데가 1군 경기에서 맞붙을 때 지역 연고를 떠나 ‘롯데맨’이었던 만큼 아무래도 롯데를 응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했던 그였지만, 롯데가 끝까지 NC의 1군 진입을 반대했던 점에 대해서는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글=권태영기자 media98@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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