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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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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안·와·르 함안 정성산업 대표

방글라데시 산업연수생 출신 사업가
산업연수생→불법체류→사업가 15년 만에 이룬 코리안 드림

  • 기사입력 : 2012-05-1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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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성산업 대표 방글라데시 귀화 한국인 안와르씨가 함안군 산인면 자신의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작업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절망과 어려운 환경은 날 더 강하게 만들었어요.

    한 달 2만원으로 살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었고

    불법체류자 때는 지병 때문에 고통을 겪었어요.

    하지만 깊고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벽 여명은 꼭 오더라고요.”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산다고 한다.

    그러나 희망은 생각만큼 쉽게 이뤄지진 않는다.

    희망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까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했다.

    여기 시련을 견뎌 희망을 맛본 한 사람이 있다.

    짙은 어둠 같았던 불법체류자 신세였지만

    자신의 인생을 빛으로 바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사람,

    방글라데시 귀화 한국인 정성산업 울라 안와르(45) 대표다.

    안와르 대표는 과거 산업연수생 출신 중

    첫 번째 사업가이자

    작은 성공을 이룬 한 공장의 대표이다.

    때문에 그는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기적’이라고 불린다.

    안와르 대표는 “한국에 대해 아는 건

    서울올림픽뿐이었을 정도로 이곳을 잘 몰랐다”며

    “한국은 나에게 기쁨과 슬픔

    그리고 꿈을 이루게 한 제2의 고향이다”고 말했다.



    ◆ 미지의 땅 한국, 기대보다 실망이 컸던 첫발

    안와르 대표는 1996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땅을 처음 밟았다. 방글라데시에서 국제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한국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만 해도 그의 꿈은 200년 동안 이어온 집안 가업을 잘 도와 생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와르 대표는 지인으로부터 한국의 산업연수생 제도에 대해 듣게 됐고, 젊었을 때 새로운 세상에 도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안와르 대표는 “산업연수생 중개인에게 4000달러를 내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당시만 해도 방글라데시에선 엄청나게 큰돈이었다”며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투자한 만큼 한국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고 말했다.

    안와르 대표의 첫 근무지는 포항이었고 이곳에서 수출용 용기 덮개(쇠뚜껑) 용접일을 했다. 평생 공부만 했던 터라 용접봉은 처음 만져봤고 육체노동도 난생처음이었다. 당시 월급은 45만원으로 본국으로 43만원을 붙이고 겨우 2만원으로 생활을 했다. 그는 좁디좁은 기숙사에서 이주노동자 4~5명과 함께 잠을 잤다. 고된 육체노동은 견딜 수 있었지만 가끔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며 천대하는 일부 한국인들의 인식 ●문에 서러울 때도 많았다.

    그는 “한국에 가면 힘든 일을 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고 한 달 2만원으로 겨우 생활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가끔 후진국에서 왔다고 욕하는 한국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은 한국 사람이 더 많아 격려도 많이 해줬다”고 말했다.



    ◆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불법체류자 시절

    안와르 대표는 지난 1997년 옛 마산시 중리의 한 공장으로 이직했다. 이곳에서 1년 2개월 정도 일을 했지만 회사가 부도나 인근에 있는 도장 공장으로 이직하게 됐다.

    1998년 9월, 안와르 대표의 비자 만료기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머니 혼자 12남매를 키우고 있었고 가업도 운영이 힘들어져 자신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9년, 안와르 대표는 불법체류를 결심하게 된다.

    안와르 대표는 불법체류자 시절을 떠올리며 불안과 긴장의 24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버스를 타거나 마트를 갈 때도 어딜 가든 사복 입은 출입국관리소 직원과 맞닥뜨릴까 눈치를 살펴야 했다. 또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밤에 작은 소리만 들려도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안와르 대표는 차라리 방글라데시로 가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불법체류로 생긴 엄청난 벌금 때문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불법체류자 시절 안와르 대표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지병인 천식이 재발했을 때였다. 천식이 재발하면 병원에 입원해야 했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병원에도 갈 수 없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해 그가 찾은 곳은 경남이주민센터였다. 이곳의 관심과 사랑으로 그는 천식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받은 사랑의 빚은 안와르 대표에겐 평생 갚아도 못 갚을 빚이다.

    그는 “불법체류를 결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삶이 절박하고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며 “불법체류자 시절 겪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정말 끔찍했고 만약 그 시절 경남이주민센터의 배려가 없었다면 지금 내 모습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 500원 동전이 이어준 아내와의 만남

    안와르 대표는 불법체류자 시절인 지난 2000년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다.

    그는 “용두산공원 전망탑에 설치된 망원경을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어리벙벙하게 있었고 아내가 500원 동전을 넣어주며 사용법을 가르쳐 줬다”며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내가 평생 믿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해줄 것을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안와르 대표는 이후 1년 동안 아내와 서로 연락하고 지내다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됐다. 그리고 2001년 안와르 대표의 아내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불법체류자 신세인 안와르 대표와 함께 마산에서 생활하게 됐다. 당시 안와르 대표는 33살, 아내는 28살이었다.

    그는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불안한 삶을 살았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며 “불안과 고통에 시달렸던 불법체류자 시절, 아내의 희생과 사랑이 날 가치 있는 한 인간으로 만들어 줬다”고 말했다.



    ◆ 안녕하세요 정성산업 안와르 대표입니다

    지난 2002년 정부는 불법체류자들에게 자진신고 기간을 줘 벌금을 내지 않고 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줬다. 안와르 대표는 이 기회를 이용해 불법체류자 신세를 면할 수 있었고, 아내와 함께 방글라데시로 돌아가 결혼도 했다. 그는 몇 개월간 방글라데시에 머물다 아내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2002~2005년 옛 마산시 중리의 한 도장공장에서 일했다.

    안와르 대표는 “도장일을 잘해 주변 업체 대표들에게 “안와르씨가 도장일을 잘하는데 직접 한번 차려 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사업에 도전하게 됐다”며 “원래 무역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주노동자 시절부터 계속해오던 도장 일이라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5년 4월, ‘정성산업’이라는 간판을 달고 안와르 대표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 한 달 동안은 혼자서 새벽 5시부터 밤 자정까지 일을 했다.

    또 주변 업체에 신뢰를 쌓기 위해 좋은 제품을 생산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의 매출은 800여만원이었고 순이익은 500여만원이었다.

    안와르 대표는 “500여만원의 순이익이 남으니 한 사람 정도는 고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시작된 게 한국노동자 2명, 이주노동자 4명의 작은 회사가 됐다”며 “올해 2월부터 제2공장을 운영해 현재 이주노동자 2명이 제2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가끔 나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 사랑에 빚진 자

    안와르 대표는 지난 201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1996년 한국 땅을 처음 밟고 15년 만에 한국 사람이 된 것이다. 귀화하는 날 그는 불법체류자 시절을 떠올렸다.

    불안과 서러움에 허덕이며 누군가에 쫓겨 작은 소리에도 숨죽여야 했던 그때. 안와르 대표는 지극히 작은 자신에게 사랑을 줬던 주변 사람들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는 사랑에 빚진 자다. 때문에 안와르 대표는 그 시절 자신처럼 괴로워하고 있을 다른 작은 자들을 돌아보려고 항상 힘쓰고 있다.

    그는 “내가 조금 돈을 벌었다고 다른 이주노동자에게 당신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냥 그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며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지금의 고통을 조금만 견디면 곧 눈물 나게 감사할 그 순간이 올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글=배영진기자 byj@knnews.co.kr

    사진=성민건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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