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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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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한글 폰트 선구자 윤판기 서예가

붓과 함께한 50년… 자연의 순리를 글씨에 담다
공부 잘하고 글 잘썼지만 ‘가난 걸림돌’
서당서 천자문·동몽선습 등 한학 배워

  • 기사입력 : 2012-05-0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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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예가 윤판기 선생이 창원시 사파동 자신의 아파트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물줄기를 본 떠 개발한 낙동강체를 비롯해 광개토호태왕비체, 물결체, 행서체 등 네개의 서체를 이용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윤판기 선생이 퇴근 후 자신의 서재에서 필묵으로 만해 한용운의 시를 필사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년시절 그는, 훅 불면 날아가 버릴까 싶을 정도로 약했다. 1955년 의령군 낙서면 정곡리 낙동강 변 한 가난한 농가의 2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보리밥과 풋나물, 감자, 고구마가 주식일 정도로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유달리 체구가 작았고, 체력도 약했다. 이런 현실을 어찌할 수 없었던 소년은 낙동강 변 무성한 갈대숲에 몸을 숨긴 채 소리 없이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그러나 ‘희망’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드러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내내 우등상을 도맡아 받았다. 낭중지추(囊中之錐)였을까. 2학년 때 가입한 서도부에서는 ‘글씨 잘 쓰는 학생’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현했다. 일찍 소질을 드러낸 점으로 보아 천부적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로 중견작가 반열에 오른 향토서예가 허재(虛齋) 윤판기(57) 선생.

    경남도청 공보관실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낙동강체와 광개토호태왕비체 등 한국 최초 한글·한자 5가지 폰트 개발이라는 ‘대업(大業)’을 이룬 그의 서예가로서의 삶은 이토록 눈물겹게 시작됐다.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자라다

    공부 잘하고 글씨 잘 썼던 그였지만, 가난의 굴레는 장래의 꿈마저 좌절하게 할 정도로 무거운 것이었다.

    언감생심,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4살짜리 소년은 들로 소를 치러 가거나, 동네 뒷산에 땔감을 하러 다녀야 했다. 하루는 뒷산 자드락길에서 청솔개비를 한짐 지고 일어나다가 약한 체구에 그만 앞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가 됐고, 자신의 현실이 너무 서러워 지게를 돌로 부숴버리는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당시 농가 재산목록 중 하나로 여겨졌던 지게를 사정없이 부숴버렸으니, 아버지가 경을 칠 것임은 분명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를 맞았고, 무서운 나머지 집을 뛰쳐나와 뒷마당 보릿대 덤 사이에 숨어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어머니는 집 나간 장남을 찾아 혼비백산했고, 외가로 보내 공부를 더 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인생의 전환점이 엉뚱하게 지게를 부수는 일에서 시작됐으니, 참 아이러니다.

    창녕군 유어면 외가로 보내진 소년은 동네 변씨 가문의 한문서당에 들었다.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 기초 한학을 배우면서 장차 서당의 선비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1년 후 수소문 끝에 창녕 남지읍 남곡중학교(현 남지중)에 입학한 그는 의령 고향마을에서 하루 왕복 6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통학해야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비가 오나 태풍이 몰아치나 굽히지 않고 이목 나루터에서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고, 이목고개를 넘어 거기서도 12㎞를 더 가야 하는 중학교 길을 3년간 오가며 무사히 졸업했다. 초등 6년에 이어 중학 3년까지 개근상은 당연했고, 서예특기장학생에다 전교부회장으로서의 리더십도 발휘했다.

    어렵게 중학교까지는 졸업했지만, 여전히 고교에 진학할 형편은 못 됐다. 전전긍긍하던 차에 창녕 옥야고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서예특기장학생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자취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연탄가스에 중독돼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다. 다행히 마을친구들에게 발견되면서 불행은 피할 수 있었다.

    졸업앨범비를 낼 형편이 못 돼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졸업장을 귀히 여기던 때라 몇 개월 후 어머니와 누이가 학교를 찾아 졸업장을 찾았고, 자취방 앉은뱅이책상과 책을 머리에 이고 40㎞가 넘는 먼 길을 걸어오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군 전역 후 기업체 입사, 공직자로 변신

    육군에 입대한 그는 서예 특기로 사단사령부 부관참모부 행정과에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차트, 상장 글씨 등을 도맡으면서 ‘글판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3군 모필 경연대회에서는 1등상을 받기도 했다.

    1978년 전역을 하고, 창원공단 1급 방위산업체인 대한중기공업주식회사(현대위아 전신) 총무부에 입사했다. 회사가 제공하는 독신자 아파트에 살면서 퇴근 후에는 오로지 서예에 몰두했다. 그 결과, 경상남도미술대전에서 5년간 특선하고 서예부문 도내 최연소 초대작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윤 선생은 서예가 명성에 힘입어 1985년 5월 경남도청 문화공보담당관실에 특채돼 공직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해 12월 결혼을 해 가정적으로 안정을 기한 그는 퇴근 후 서예에 더욱 정진할 수 있었다.

    1993년에는 대한민국서예대전에 광개토호태왕비 예서체 작품이 특선하면서 전국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후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초대작가로 선정돼 중견작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창원시 사파동 동성아파트 19층 5평 남짓한 서재는 그의 열정이 오롯이 스며 있으며, 요즘도 퇴근 이후에는 고독한 정진의 공간으로 변한다.


    ◆국내 최초 한글·한자 5개 폰트를 개발하다

    윤 선생의 50년 가까운 절차탁마는 서예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게 했다.

    공무원으로서 전국 처음으로 한자 ‘광개토호태왕비체(KS5601)’ 4888자 손글씨 폰트를 개발했으며, 아울러 한글 ‘물결체’ ‘동심체’ ‘한웅체’ ‘낙동강체’ 폰트도 개발해 독보적 서예가로 우뚝 섰다. 특히 자신이 개발한 한자·한글 폰트를 행정기관과 교육기관, 일선 학교 등 1만여 대의 컴퓨터에 무료로 보급한 사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선행이다. 폰트 등록과 관리를 대행하는 서울의 ‘폰트뱅크’와 어렵게 협의해 관공서 공문타이틀과 각종 상장, 표창장, 위촉장, 비문, 현판, 이정표, 책표지, 신문 컷 서체 등으로 쓸 수 있게 해 ‘나눔 정신’의 사표가 되고 있다.

    윤 선생은 한국서가협회 이사이자 부산경남지회 부지회장으로서 6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각종 초대전·그룹전 300여 회 기록도 갖고 있다.

    그의 휘호는 중앙부처 등의 슬로건으로도 많이 걸려 있다. 외교통상부 ‘국민과 함께 세계와 함께’, 감사원 ‘聽於無聲視於無形’(청호무성시어무형 : 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체 없는 데서 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天下憂樂在選擧’(천하우락재선거: 천하의 근심과 즐거움이 사람을 잘 뽑고 못 뽑는 데 있다) 등이 그것이다. 그는 또 람사르총회 슬로건 ‘건강한 습지 건강한 인간’, 경남도 슬로건 ‘대한민국 번영1번지 경남’ 등을 직접 썼으며, 일등경남 경찰 표석, 창원 남산공원 창원대도호부연혁비, 배중세 지사 순국기념비, 창원지방법원, 통영해저터널, 경상남도의회 각석, 자굴산, 한우산, 미타산, 남덕유산, 무룡산 정상 표석 등 주요 비문 600여 점도 남겼다.



    ◆어느덧 이순이 눈앞, 삶을 관조하다

    ‘매일매일 경계하고 뽑아버리지 않으면, 잡초처럼 무상해지는 것이 교만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우주만물의 무상(無常)을 관조할 능력이 갖춰지는 이순(耳順)에 다다른 허재 선생은 이 경구를 좌우명으로 여기며 한없이 겸손해지려 애쓴다. 그의 사파동 자택 거실 차양막에는 정재봉 선생의 시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가 낙동강체로 필사돼 있어 평소 그의 삶의 태도를 엿보게 한다.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 추녀 끝의 풍경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중략) /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하략)’

    허재(虛齋)는 한국서가협회 부산경남지회장을 역임한 배형동 선생이 지어준 아호다. 대나무같이 속이 텅 비어 무엇이라도 새로이 채워 넣을 수 있는 여백을 가지라는 의미에다, 겸손하되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말라는 뜻이 스며 있다.

    정일근(경남대 교수) 시인은 헌시 <자연의 글, 사람의 글>에서 윤 선생을 일러 “먹을 갈아 붓 한 자루로 우주의 법칙, 자연의 순리를 가르치는 사람,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예찬했다. 단지 글씨만 잘쓰는 ‘기능인’이 아니라, 깊은 사유에서 비롯되는 사상가로서의 소양과 따스한 인간미를 갖춘 허재의 내면을 대중에게 널리 알려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글= 이상목기자 smlee@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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