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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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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덕규 제과 기능장

“맛있는 빵 만드는 비법은 즐거운 마음”

  • 기사입력 : 2012-04-2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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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덕규 제과기능장이 직접 운영하는 김해시 삼정동의 김덕규 과자점에서 케이크를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김덕규 제과기능장이 오는 5월 대전에서 열리는 세계조리사대회를 앞두고 초콜릿 공예를 준비하고 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17살에 빵집에 취직해야 했던 김덕규(48) 제과 기능장.

    그동안 숱한 시련과 위기가 있었지만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계발로 꿋꿋이 이겨내고

    성공의 문턱에 들어섰다.

    제과 기능장을 취득했고 제과·제빵 올림픽으로 불리는

    월드페스트리팀 챔피언십(WPTC)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지금은 어딜 내놔도 뒤지지 않는 규모의

    제과점 사장님이 됐다.

    뿐만 아니라 38살 때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졸업한 뒤

    학사,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올해 교수로 임용됐다.


    ◆17살때 내키지 않은 빵집에 취직

    김덕규 제과 기능장은 통영 앞바다 최남단 한려수도의 끝자락에 있는 욕지도에서 어민의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배를 여럿 가진 선주였으나 사업 실패로 김 기능장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빚잔치를 하고 통영시내로 나왔다.

    그후 이곳저곳 이사를 했으나 집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 후 더 이상 학업을 지속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취업해야 했다. 형님이 전기일을 하고 있어 전기나 기계업종에서 일하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배는 곯지 않는다’며 빵집에서 일하라고 해 1980년 제과제빵계에 입문하게 됐다.

    내키지 않게 빵집에 취직했지만 타고난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해 2년 뒤에는 마산의 빵집 책임자로 스카우트됐다. 그 뒤엔 마산, 창원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27살 때 그가 일하던 빵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현재의 아내를 만나 1년 뒤 결혼했다. 둘 다 부모 도움 없이 어렵게 살림을 시작했지만 3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아 1993년 김해 부원동에 ‘그린하우스 과자점’을 개업했다.

    빵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잘되자 지점을 내야겠다고 결심해 1997년 김해 삼정동 현재의 위치에 ‘김덕규 과자점’을 개점했다.

    하지만 곧 시련이 닥쳤다. IMF가 터진 것이다. 게다가 직원 관리가 안돼 두 곳 중 한 곳은 정리를 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결국 장사가 잘되던 부원동 가게가 먼저 팔리는 바람에 삼정동 ‘김덕규 과자점’이 살아남게 됐다.



    ◆자기계발·도전으로 위기 극복

    한때 ‘김덕규 과자점’은 6개월 동안 장사를 해도 남은 돈은 30만원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손님이 적었다. 그는 위기를 자기계발과 실력으로 이겨냈다.

    1990년 후반부터 전국 제과·제빵 경연대회에 참가해 상을 휩쓸다시피 하고, 몇 년간 준비 끝에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한 제과 기능장을 취득(2002년)하자 자연스럽게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빵·과자를 만드는 것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으로 세계 대회에도 참가했다.

    2008년 국내 선발전을 거쳐 국가대표로 월드페스트리팀 챔피언십(WPTC)에 출전했지만 입상하지 못했다.

    2년 뒤 다시 이 대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2009년 선발전에서 초콜릿 공예 부문에 대표로 뽑힌 사람이 개인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자 대신 참가하게 된 것.

    2008년 대회에 고생 끝에 참가했지만 좋은 성적을 못낸 것이 아쉬워 재도전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국가별 3명의 대표가 참가해 초콜릿 공예, 설탕 공예, 과자맛 부문 경연을 벌이고, 개인성적을 합산해 전체 시상을 하는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초콜릿 공예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 수상을 계기로 모든 것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인기를 얻으면서 제빵에 대한 관심이 고조돼 방송출연을 하게 됐고, ‘제빵왕 김탁구’로 불리게 됐다.

    “김탁구와 이름도 비슷하고 ‘제빵왕 김탁구’ 방영 중일 때 월드페스트리팀 챔피언십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제빵왕으로 불리는 것 같다”면서 “어떤 이들은 ‘제빵왕 김탁구’의 실제 모델이냐고 물어보기도 한다”며 웃었다.

    제과점의 기반이 잡히자 중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이었다. 38살 때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마친 후 창원전문대 제과제빵과를 졸업한 후 경남대 경영학과에 편입해 학사학위를 딴 뒤 지난해 부경대 식품공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7년간 창원전문대, 양산대, 창신대 등에 출강하다가 지난 3월 양산대 호텔식품제과제빵과 전임교수로 임용됐다.

    “너무 힘든 시절을 많이 거쳐서 빵집을 그만두려고 교직에 입문했는데 지금은 빵집 규모가 커져 문을 닫지 못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김덕규 제과점과 작년에 가야CC 근처에 오픈한 ‘쇼콜라 클래식’이라는 초콜릿 카페에 근무하는 직원은 40여 명. 이 중 17명이 200~250종류의 빵과 과자, 초콜릿을 만들고 있다.

    오전 7시부터 자정까지 연중 무휴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들은 오전 6시30분부터 9시까지 일하기 때문에 노동강도가 센 편이다.

    하루 5번 이상 소량으로 빵을 만들기 때문에 갓 구운 빵이 진열돼 있는 데다 재료가 신선하고 내용물이 알차 ‘김덕규 제과점’에는 늘 빵을 사러온 손님들로 북적인다.



    ◆“혼신을 다해 빵을 만든다”

    김덕규 기능장은 제과점의 마진이 높지 않아 주위에 빵집을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말린다고 털어놨다. 재료비 비중이 45%인 데다 인건비, 유지비 등으로 일정한 수준의 매출이 나오지 않으면 폐업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료비 상승, 대형 체인점 진출 등으로 제과점의 경영이 악화되면서 폐업했거나 폐업을 고려하는 빵집이 크게 늘었다”면서 “2005년께 부산에 1500여 개 제과점이 영업했었는데 지금은 400여 개만 있고, 김해도 80여 개에서 35개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월드페스트리팀 챔피언십에서 수상한 후 업체들의 사업제안이 많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공동사업을 하면 체인점 개설이 늘어나 돈을 벌 수 있지만 나를 믿고 체인사업에 뛰어든 다른 사람들은 잘 벌 수 없어 사업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지금 제과업에 입문했거나 입문하려는 청년들에겐 희망이 있다고 했다. 초콜릿, 과자, 케이크, 쿠키 등 분야별 전문점이 생기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직업의식을 갖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빵을 만들 때 혼신을 다한다고 했다. 딴생각을 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면서 손의 기운, 정신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맛있는 빵이 나온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건성으로 일하거나 인상을 쓰며 근무하는 직원들을 많이 내쫓았다고 했다.

    제과업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욕을 먹을까 조심스럽다면서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힘이 들더라도 기술개발 등 자기 투자를 하면 프랜차이즈 업체와 경쟁해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세계 제과시장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도록 실력 있는 후배들을 많이 양성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양영석기자 yys@knnews.co.kr

    사진= 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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