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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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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유신시대 마산 '수림음악실' DJ 김의권씨

“대중가요 대신 반전음악 틀며 자유 갈망한 DJ였죠”

  • 기사입력 : 2012-02-2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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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신시대인 1970년대 후반 마산서 ‘수림음악실’을 운영했던 김의권씨가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 ‘소리고을’ 커피숍에서 옛날 즐겨 듣던 레코드판을 꺼내보고 있다.




    지난 연말 ‘부마민주항쟁 증언집(마산 편)’이 나왔다. 이 책에 수록된 당시 관련자 40명 중에는 음악실 디제이(DJ)도 들어 있다.

    30여 년 전 마산경찰서(지금의 마산중부경찰서) 앞 수림음악실 디제이였던 김의권(60)씨가 바로 그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해줄 이야기도 없는데….” 취재를 사양하던 그를 설득해 창원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청바지에 머리를 묶고 헌팅캡을 쓴 예사롭지 않은 풍모에서 그의 삶의 이력이 느껴져 왔다. 음악실 디제이가 겪은 10·18의 증언을 통해 당시를 더듬어 본다.



    “그때 음악실은 소통의 장소였죠”

    “유럽은 카페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광장과 실내 카페를 중심으로 소통과 공론이 이뤄졌습니다. 유신시대인 우리나라 70년대는 음악실이 소통의 공간이었습니다.”

    1979년, 20대 청년 김의권은 지금의 마산중부경찰서 맞은편에서 수림음악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가 음악을 접한 것은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수산대학 증식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교공부에는 애시당초 흥미가 없었다. 그림을 좋아해 미술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좌절을 겪던 때였다. 부산의 남포동 한 음악감상실을 출입하면서 음악의 세계를 만나고, 디제이로 발탁된다.

    부산 울산 진주 등지를 돌며 디제이 경력을 쌓은 그는 1978년 수림음악실을 인수, 사장 겸 대표 디제이가 된다. 지금의 삼일정풍병원 자리쯤에 있었다고 한다. 100석 규모의 극장식으로 앞쪽 벽면 대형 유리박스에 디제이가 자리했다. 싸구려 커피 한 잔 시키고, 쪽지에 곡명을 적어주면 디제이는 노래를 틀어주고, 해설을 하는 식이었다.

    특별한 디제이, 김의권은 대중가요 대신 주로 밥 딜런 유의 반전 평화 음악이나 김민기의 ‘아침이슬’ 등 방송금지곡을 틀면서 반정부 멘트를 날렸다.

    “무모했죠. 무식해서 용감했다고 할까요. 우쭐하는 기분에 그때 인기 있던 클리프 리처드의 ‘더 영 원스’나 김추자의 ‘님은 먼곳에’ 노래 신청하면 무시해 버렸습니다. 대신 반전 평화의 노래나 국내 금지곡을 틀었습니다. 에둘러서 정부를 비판했죠. 영국가수 킹 크림슨의 ‘에피탑’의 가사를 빌려 민중이 직접 자기 역사를 쓰게 한다면 묘비명에 뭐라고 쓸 것이냐 하는 식입니다.”

    밥 딜런의 월남전 반대 노래는 유신정권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음악을 듣는 학생들에게 “다른 애들은 데모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음악이나 듣고, 뭐하냐? 너희도 나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수림음악실은 입소문을 타고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시국을 논하는 공간이 되었다.

    김씨는 YMCA에 있던 김종대(현 창원시의원), 경남대 학생 최갑순, 옥정애 등과 반정부 유인물 작업도 공모(?)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서 그랬던 것 같아요. 겁이 없었죠. 이선관 시인, 갯벌동인 최명학씨, 가톨릭 쪽의 젊은 문화인 그룹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다가 김종대씨 등과 반정부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자는 논의도 했습니다. 실천은 못했습니다.”




    반전 평화 저항정신 추구한 히피

    김씨의 반골 기질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남포동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을 출입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머리 장발하고 청바지 찢고, 자유분방한 삶을 지향하는 히피(hippie)들이었다. 히피족은 기성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과 자연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주장하며 자유로운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젊은이들로,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생겨나 전 세계로 퍼졌다.

    히피는 히피를 알아보고, 히피끼리 모인다고,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사진작가 조문호 등과 어울렸다. 조문호씨가 운영하던 ‘한마당’에는 김현장, 문부식, 김은숙 같은 미문화원 사건 관련자들도 오고 그랬다.

    “히피들과 반골들이 정서적으로 맞나 봐요. 거기에 환경운동하는 낙동강공동체 김상화, 서울에 있는 신촌블루스 엄인호 등이 모였어요. 당시 나에게는 세상이 무조건 다 삐딱한 거예요. 세상이 그냥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당시 우리 문화라는 것은, 소리 문화든 그림 문화든 글 문화든 모든 문화가 다 통제되어 있었어요. 사회 자체가 너무나 통제되어 있었죠.”

    김씨의 이 같은 의식은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등 사회과학서적과 철학서들을 읽으면서 자기논리를 세웠다.

    히피즘으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히피즘은 자신의 행복에 최대 관심을 가지며 개인의 개성존중, 자율에 의한 자유를 중시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인종차별반대 운동 및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등을 계기로 점차 반전·비폭력·사랑을 추구하는 운동 양상을 띠었다. 이들의 영향은 록음악 등을 대표로 하는 히피컬처를 낳았고, 정치적으로도 뉴레프트 운동과 결부됐다. 밥 딜런, 존 바에즈 등의 가수는 인종차별 반대나 월남전 반대를 노래로 이끌었다.

    김씨의 국가관도 분명했다. “개인이 국가보다 우선합니다. 국가시스템은 국민을 복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재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애국심도 생깁니다.”

    그래서 지금의 ‘세시봉’ 문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70년대 포크음악의 대표 격인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 등이 주도하는 세시봉이 당시 문화에 대한 복고나 반추에 머물고 있다고 질타한다. 적어도 70년대 청년문화를 얘기할 때는 ‘저항’이라는 시대정신을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내 최갑순과 10·18 부마민주항쟁

    김씨의 부인은 경남여성회 부설 여성인권상담소장인 최갑순씨다. 10·18 마산시위를 얘기할 때 최씨를 빠트릴 수 없다. 경남대 재학생이던 최씨는 정성기(경남대 교수), 옥정애 등과 시위계획을 세웠고, 10월 18일 시위로 경찰에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증언집에서 최씨는 남편을 이렇게 증언한다. “수림음악실에 어떤 디제이가 ‘터놓고 얘기합시다’라는 코너를 만들어놓고 노골적으로 박정희를 막 까는 거예요. 언어구사가 촌철살인이고, 엄청나게 신선했어요.” 그렇게 해서 반골기질의 두 사람은 1979년 5월에 만난다.

    10월 18일 오후 최씨는 경찰에 끌려갔고, 창동시위에 앞장선 김씨는 그날 밤 황금당골목에서 고립된다. “우르르 몰려다녔어요. 그때는 조직적인 리더는 없었고, 구호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였어요. 서로 아는 게 없으니까 노래는 무조건 ‘애국가’였습니다.”

    유신정권의 마지막이 됐던 부마민주항쟁의 한 고비에 열혈청춘 김씨와 최씨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김씨는 음악감상실을 접고, 1981년 최씨와 결혼한다. 반골 기질의 두 사람은 신혼여행도 역사의 현장 광주로 갔다.

    부산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통반장까지 나서서 그들을 감시했다. “간첩이 부부가 됐다더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할 수 없이 다시 마산으로 내려왔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디자인 계통 일을 하며 소시민으로 살고 있다.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격정의 시대를 살아왔던 김씨는 민주주의를 화두로 말을 맺었다. “민주주의의 대의는 소통과 결합해야 합니다. 비판의견이 표출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광장이, 요즘은 SNS가 그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혹 정보네트워크까지 장악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직접민주주의가 가능성이 더 커져 희망적입니다.” 글= 이학수기자 leehs@knnews.co.kr

    사진= 전강용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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