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청년예술인 (10) 통제영무예단 정희영 대표
내 안의 ‘단단한 나’를 찾아 매일 400년 전 무사가 된다초등학교 때 아버지 사업실패로 환경 변화두려움과 열악한 환경 이겨내려 운동 몰입
- 기사입력 : 2023-07-14 08: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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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 공인 6단으로 남편과 도장 운영 중
24반 전통무예 공연 매력에 빠져 무예 배워
통제영무예단·협동조합 ‘다움’ 대표 활동
“통영 역사와 시너지 효과 낼 방법 모색 중”
‘훗!’ 짧게 끊어지는 호흡과 함께 그녀의 날카로운 검이 허공의 한 점을 깊숙이 찌른다. 검은색 한복두루마기에 수놓인 조선호랑이가 바람에 펄럭이며 소리 없이 포효한다. 검 끝이 향한 소나무가지가 파르르 떨리고 놀란 새가 날아올랐다. 동시에 허공을 베며 그녀도 날아올랐다. 베고 찌르고 막고 돌아서며 다시 베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은 분명 무사였다. 그러나 동작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그녀의 눈빛은 집요하게 한 점을 노리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 공연 중 통제영무예단 정희영 대표의 검무 공연.그녀만 볼 수 있는 적이 그 앞에 있기라도 한 듯, 입술을 깨문 그녀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베는 순간, 착시였을까. 허공에 떨어지는 잎이 두 동강 나는가 싶더니 동시에 대오를 횡으로 정렬한 군사들이 장창을 내지르며 우렁찬 기합을 넣는다.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장창, 당파, 협도 같은 살벌한 무기들이 날을 번득였다.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선군병들이 24반 전통무예 중 마상무예를 제외한 18반 무예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는 공연장.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이던 임진왜란 전투현장 열기가 그대로 후끈하게 전달된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으로 이 나라를 농락했던 왜군들을 소탕하던 기개는 하늘을 가르고 바다를 벨 듯했다. 이윽고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 소리와 함께 공연이 막을 내렸다.
공연 후 다시 만난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무대 화장을 지우고 단정한 사복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가 서슬 퍼런 검을 휘두르던 ‘그녀’가 맞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검을 잡았을 때의 매서운 표정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식 직함은 ‘통제영무예단’ 대표 정희영(38).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다움’ 대표를 겸하고 있다.
“400년 전에 봤던 정희영 대표님 맞습니까?”라며 가벼운 농담에 그녀가 살며시 웃었다.
“퇴근했으니, 지금은 2023년의 저죠.”
400년 전으로 출근하는 여자. 천년의 시간을 오갔던 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겹치는 건 우연이었을 것이다. 정희영 대표에게 24반 전통무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조선 초기까지는 주로 성을 쌓고 방어적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적의 공성전(攻城戰)에 방성전(防城戰)으로 맞서며 활을 주력 무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백병전의 전력강화 필요에 따라, 무예를 중요시하기 시작했고, 원병을 이끌고 왔던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에게 무예6기를 배운다. 1749년(영조25)에는 죽장창·기창·예도·왜검·교전·제독검·본국검·쌍검·월도·협도·권법·편곤의 12기를 더하여 무예18기를 병사에게 훈련했다. 1790년(정조14)에는 마상무예인 기창·마상쌍검·마상월도·마상편곤 4기와 격구·마상재 2기를 더 보태어 무예24반을 완성했다. 정조의 명을 받은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초관 백동수가 24가지의 무예를 정리하여 1790년 4월에 ‘무예도보통지’를 장용영(국왕 호위대)에서 펴내 전 군영에 보급했다.
합기도 공인 6단의 정희영 대표.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네 합기도 도장을 들렀다가 그 매력에 푹 빠진 뒤 아주 몰입하게 됐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초등학교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겪었다. 가족들은 친척 집을 전전했고, 엄마는 종일 횟집에서 일하며 생활비와 자녀 학비를 벌어야 했다. 두 동생을 챙기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몫. 아무도 보호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외부의 위력을 방어하기에는 어렸고 무기력했다. 혹시라도 동생을 잘못 돌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그런 열악한 환경에 가족을 내동댕이친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적의. 그런 것들이 공격적으로 운동에 몰입하게 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지금은 운동이 직업이다. 정희영 대표는 통영에서 ‘대한무술관’이라는 합기도 도장을 남편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서울에서 내려온 24반 전통무예 공연은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운이 좋아 합기도 스승이자 국궁 명궁인 임채훈 스승으로부터 24반 전통무예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리고 그녀답게 완전히 몰입해 지금에 이르렀다. 그동안 벌인 일들이 너무 많다. 젊은 단원들이 공연과 자립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다움’이라는 청년문화예술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24반 전통무예를 상설 공연할 수 있는 길도 고민 중이다. 현재는 한산대첩축제위원회가 24반 전통무예공연에 관심을 가져 삼도수군통제영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 앞으로 통영의 역사적 자산과 함께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방법도 모색 중이란다. 정희영 대표의 이런 저력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어렸을 때 자신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공격적 에너지는 위험한 외부 세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어느 순간부터 밖으로 포효하던 에너지가 내면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내면의 ‘나’를 보았다. 세상을 향해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못난 자신의 모습이었다. 적은 내 안의 ‘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겨누는 칼끝에는 아직은 덜 익은 ‘내’가 있지만, 부족한 ‘나’를 하나씩 베어나가면 언젠가 보다 단단해진 나를 만날 것이라 생각한다며 담담히 웃는 정희영 대표의 표정은 활기차다.
통영은 대한민국 관광 1번지다. 수려한 풍경과 다양한 먹거리. 거기에 역사와 전통문화가 함께 호흡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미 청주의 상당산성을 비롯한 국내 여러 지역에서 24반 전통무예를 관광아이템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획 중이란다. 통영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일본수군을 초토화시킨 한산대첩의 위대한 역사와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충무공의 유산과 문화가 찬란하게 빛나는 곳이다.
전통무예의 웅장한 볼거리와 스토리가 통영이 가진 역사와 만난다면 통영을 스토리텔링하는 멋진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희영 대표의 목표다.
“연습이 있다”며 그녀는 일어선다. 400년 전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꿈결인 듯, 아득히 조선 군병들의 우렁찬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목표를 설정하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다. 오늘도 그녀는 타임머신을 타고 400년 전으로 가서, 과거를 움직여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김홍섭 소설가김홍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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