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말을 잘 못해서요.”
작은 카페에서 만난 김규태(29) 작곡가가 웃음을 토핑해서 내민 짤막한 첫 마디다. 20대, 젊으니까 톡톡 튀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였다. 말끔한 얼굴, 처음 깎은 새 연필처럼 단정하고 긴 체형. 첫인상은 조용한 시인 같은 이미지였다. 인터뷰가 재미없어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표정엔 웃음이 부풀고, 말은 잡아당긴 고무줄처럼 길어진다. 경남에선 희소하다고 할 만한 20대의 청년 작곡가와의 첫 만남이었다. 음악계에서는 아직 약관이랄 수 있는 나이지만 그가 해온 작업의 양과 폭은 또래의 작곡가에 비해 풍부하다. 지역음악계에선 다양한 무대를 얻기 위한 비즈니스 활동도 무시 못 한다. 소극적인 첫인상으로 봐서 그 방면은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잘 구워진 쿠키 같은 웃음이 인간관계의 밑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규태 작곡가가 작곡한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다.MZ세대 작곡가의 일상은 뭔가 특별한 일들로 하루가 채워지지 않을까. 그런 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고 작업하거나 안 풀리면 집 근처에 있는 진해내수면생태공원을 자주 걷는다. 수면에서 유영하는 물고기, 나뭇가지의 흔들림, 자유로운 새들, 풀꽃이나 풀벌레들 관찰하는 감성충전시간이다. 배터리 채워 집에 오면 컨디션 좋은 날은 작업이 술술 풀린다. 그렇지 않은 날은 내수면생태공원도 약발 없다. 마감 날짜가 다가오면 초조해진다고. 자극을 받기 위해 피아노 건반 두들기다가 더 안 풀리면 기타를 꺼내 두들기거나 베이스기타까지 두들기다가 플루트 꺼내 들고 다시 산책 나간다.
일반인의 생활패턴에 비하면 아침 먹고 출근 안 하는 것만 해도 좀 특별하기는 하다. 뭔가 건지겠다고 이 악기 저 악기 두들기는 것도 일반인들의 일상과는 멀다. 29살의 멀쩡한 남자가 방에서 혼자 머리 쥐어뜯고 얼굴표정을 있는 대로 구기면서 화면에 뜬 오선지에 ‘콩나물대가리’를 쳐 넣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약간은 기괴스럽다. 악보 붙잡고 끙끙대다가 갑자기 풀리기 시작하면 그때의 몰입은 무아지경, 귀에 들어오는 게 없다고. 작업과정은 ‘골 때리지만’ 작품이 완성되면 머리 아픈 건 싹 잊고 행복하고 재미있다는 생각만 남는단다. 작곡이란 요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방에선 팬에 불 지르고 칼질소음이 난무하지만 고객 앞에 나오는 음식접시는 정갈하고 예술에 가깝지 않은가.
한 공연장에서 베이스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김규태 작곡가.아버지의 클래식 음반 수집으로 음악 접해
다양한 악기 다루며 음악의 길 꿈꿨지만
부모님 반대로 좌절 중 고교 때 작곡 공부
취미도 직업도 되는 음악교육과 진학
“제가 어릴 때부터 아빠가 광적으로 클래식 음반을 수집하셨어요. 아빠 때문에 엄마도 클래식 팬이 되었고요.”
그런 환경에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는 자연스럽게 음악에 젖어들었다. 음악은 행복 그 자체였다. 나중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고 어떤 결과에 도달하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음악이 좋았고 음악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대로 죽 가면 된다” 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기타도 치고 다양한 악기를 다루었다. 아빠는 그런 아들을 지켜보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만 해도 아빠가 자신이 가려는 길에 든든한 후원자인 줄 착각했다.
창원 양곡중학교를 다닐 때다. 기타 치며 밴드활동하는 김규태 학생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 한 분이 김규태에게 공연티켓을 건네며 관람하기를 권했다. 록밴드 공연이었다. 지방에선 접하기 어려운 대형무대. 약간의 호기심만으로 갔다가 강렬한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놓는 무대. 그것은 소도시의 ‘음악촌놈’에겐 신세계였다. 김규태는 행복한 함정에서 재미있게 놀기로 했다. 티켓을 건넨 조성은 선생님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술교사였다. 그런데 행복은 잠깐. 복병은 따로 있었다.
김규태 작곡가.집을 진해로 이사하고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김규태는 아빠에게 음악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다, 아빠의 대답은 노! 전혀 예상 밖이었다. 항상 음악활동을 지원해주시던 아빠가 왜? 돌아온 대답은, 취미로서 음악은 좋지만 직업으로서의 음악은 안 된다는 것. 몇 번 어필했지만 아빠는 단호했다. 그때부터 취미로서의 음악활동조차 아빠는 경계했다. 김규태가 좌절의 늪에서 허덕일 때 또 한 사람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중앙고등학교 조혜령 음악선생님.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음악수업이 없었다. 시험감독 들어오신 음악선생님이 작곡을 전공했다는 얘기를 듣고 지푸라기 잡는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선생님은 외면하지 않았다. 저녁 야간자율수업 시간 전에 김규태 학생만 따로 무료 개인교습을 해주었다. 함께 우회로를 만드는 공모(?)도 했다. 취미도 되고 직업도 되는 길. 음대가 아니라 사범대 음악교육과를 가겠다는데 아빠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작곡발표회부터 동요·관악·뮤지컬 등
또래 비해 작업의 양과 폭 풍부… 수상도
“작업 힘들지만 작품 완성 땐 행복하고 재미
요즘 환상적 협업 와닿는 영화음악 관심”
요즘 관심은 영화음악이다. 2017년에 개봉한 판타지 영화 ‘The Shape Of Water(마음의 모양)’의 OST이자 오프닝 곡인 Alexandre Despla를 듣고부터다. 눈으로 읽는 화면의 언어에 청각을 통해 자극하는 음악이라는 언어가 더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그 환상적인 협업이 마음에 강하게 와닿았다고 한다. 한국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을 맡았던 일본인 류이치 사카모토와 영화음악계의 거장 한스 짐머 이야기를 할 땐 눈이 반짝였다. 다만 지역이라 영화감독을 찾기도 만나기도 어렵다는 것.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길이 막히면 어딘가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이젠 안다.
김규태 작곡가는 경남대학교와 인제대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창작동요제 은상, 개인작곡발표회에서 ‘시선’을 공연했고, 제주국제관악제에 공연된 행진곡 ‘섬집아기’ 작곡, 진주시립교향악단에서는 편곡을 맡았었다. 한마심포니 밴드 편곡, 뮤지컬 ‘을의 세탁소’ 작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곡과 편곡 경험을 쌓는 중이다. 지난 5월 24일에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어린이 뮤지컬대회에서 김규태 작곡가가 작곡한 교통안전 뮤지컬이 영예의 대상을 안았다. 이달 6월 30일 7시 30분에는 창원 3·15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경남창작관현악축제 ‘노래가 된 나의 시’에 소리꾼과 피아노 5중주 구성으로 시인이자 아동문학가 도희주 선생의 노랫말 ‘사막에 핀 민들레’가 김규태 작곡가의 창작곡으로 연주된다.
‘직업은 취미, 작업은 재미’라는 김규태 작곡가. 지금 최고의 후원자는 아빠라며 바쁘게 일어나 작업실로 향한다. 악기를 있는 대로 내놓고 두들길지, 아니면 화면 째려보며 악보를 쳐서 넣을지 알 수 없지만, 바삭한 식감의 브라우니쿠키 같은 웃음 한 조각 흘리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한국의 한스 짐머를 꿈꾸는 젊은 패기가 느껴졌다.
김홍섭 소설가김홍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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