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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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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편지- 김인혜(소설가)

  • 기사입력 : 2010-03-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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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출해서 돌아오다가 우편함을 열어 본다. 우편함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받아도 무방한 홍보용의 인쇄물과 카드회사에서 보낸 우편물만 그득하다. 나 역시 우편으로 편지를 보내지 않고 이메일을 통해 간단히 소식만 전하고 산 지 꽤나 오래되었다.

    한데, 봄 햇살에 느긋하게 앉아 읽을 편지가 문득 그리워짐은 왜일까. 봄 햇살 아래서 읽는 편지는 굳이 연서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살아가는 진솔한 얘기 아니면 목소리로는 전달이 곤란한 내밀한 마음의 소리를 곁들인 친구의 편지면 족하겠다.

    가끔 책장 정리를 한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이것저것 어질러 놓은 한가운데 하루 종일 앉아 있게 된다. 오래전 손으로 썼던 묵은 일기, 누렇게 변해버린 묵은 편지에 빠져드는 탓이다. 그 속에는 내 젊은 날의 고뇌와 방황, 기쁨, 또 다른 무엇들이 생생히 들어 있어 고스란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오래전, 이틀이 멀다 하고 내게 편지를 보내던 친구가 있었다. 내 단짝 친구였던 옥순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집에 얹혀살았던 그녀는 공부를 꽤 잘했다. 학교에서 그녀는 영리하다는 소릴 들었다. 선생님들은 그녀에게 가장 좋은 성적을 주었고, 특히 필체가 깨끗하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도 못하고 공장에 취직했다. 돈을 벌면서부터 야간학교라도 갈까 했지만 월급날만 되면 큰집 오빠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의 편지 내용은 늘 우울했다. 봄이 오고 꽃들이 활짝 필 무렵이면 더 움츠러드는 듯해서 마음이 짠했던 기억이 난다. 너는 친구지만 언니 같고, 때론 엄마 같다는 고백을 그녀는 곧잘 했다. 이 세상에 기댈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던 그녀가 외로움을 견디면서 밤마다 써서 보냈던 내밀한 고백들. 속내를 막힘없이 술술 잘도 풀어냈다.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어느 봄날이었다. 그해 봄, 우리는 막 스무 살을 맞이했고 그녀는 어떤 남자와 열애 중이었다. 앞마당의 목련이 막 봉오리를 터트리고 있었고, 온 천지에 봄기운이 그득하던 날이었다.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 그날의 편지 내용은 남자친구 이야기뿐이었다. 그 누구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녀는 그 남자에게 푹 빠져들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몇 달 후였다. 그녀의 편지를 받고 뭔가 예사롭지 않은 낌새를 느꼈다. 사촌 오빠 몰래 월급에서 빼돌렸던 비상금마저 그 남자에게 다 털렸다고 했다. 임신을 시켜놓고 남자는 돈만 챙겨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고. 편지지 군데군데 눈물자국의 흔적을 보니 울면서 쓴 것이 분명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둘러 그녀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미 하늘나라로 떠난 뒤였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가 될 줄이야.

    우린 같은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사정상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전화통화로는 곤란한 이야기들을 편지로 주고받으며 마음과 마음을 이어갔다. 이 세상에 없는 것도 만들어내어 그리워했던 그 예민했던 시절, 자주 만날 수 없었기에 그리움은 한없이 더욱 증폭되었던 것이 아닐까. 형편이 어려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돈벌이를 해야 했던 그녀는 편지 쓰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었는지도 모른다. 만년필로 꼭꼭 눌러썼을 법한 진솔한 편지들을 나는 유감스럽게 한 장도 보관하질 못하고 있다. 그때엔 왜 그 고백의 무게를 감지하지 못했던 걸까. 아쉬움이 남는다.

    오늘 밤에는 그녀에게 답장을 써서 하늘나라로 부쳐야겠다.

    김인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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