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과거신문보기   |  
2021년 10월 20일 (수)
전체메뉴

심재근의 우리 땅순례 ⑥ 안동 도산서원

  • 기사입력 : 2005-08-18 00:00:00
  •   
  •   굽이마다 꼿꼿한 선비정신 서려


      새뮤얼 헌팅턴은 ‘문화가 중요하다’는 책에서 90년대 초 한국의 소득이 30년 전에는 같았던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15배 높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한국의 기적은 다른 문화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교육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배우지 못하면 사람이 안 된다는 유학의 가르침에 순종하느라 열심히 공부했다. 정신문화의 초석이 되었던 유교는 세계의 어느 종교보다 근면과 검소. 배움을 강조했다.

      아직도 굽이마다 꼿꼿한 선비의 유교 정신이 살아있는 안동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에는 따가운 여름 햇볕에 철 이른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있다.

      [오천문화재단지]
      도산서원 가는 길에 오천군자리는 이곳에서 5리쯤 떨어진 광산 김씨의 예안파 동족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번듯한 건물 열한 채를 와룡면 오천리로 옮겨왔다.

      안동 종친회 부회장 김욱한(☎ 011-504-0325)씨에게 미리 연락을 한 터라 마을 입구에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안동호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마을의 유래를 듣고 함께 둘러보았다.

      집들은 조붓한 언덕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다. 군자리를 지키던 집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제자리에 앉은 집의 의연함과 자연스러움은 잃어버려 아쉽지만. 집 한 채 한 채가 똑똑하고 의젓하여 옛 조선집의 멋과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은은한 전통의 향기가 느껴지는 후조당에서는 한복을 입는 의생활 체험을 비롯한 다양한 한옥체험을 하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높다란 그네는 더운 여름인데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퇴계 이황선생이 학문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 매진했던 '도산서원'

      [도산서원]
      오천문화재 단지를 나와 안동댐을 따라 이어지는 예안길을 몇 굽이 돌아 안막재에 오르면 느릿한 경사길이 시작되는데 마음도 따라 느긋해진다. 안동댐이 건설되기 이전에 서원으로 가는 길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오솔길을 따라 이어졌다.

      오솔길을 따라 가다보면 서원의 입구 오른쪽 석간대라는 바위 언덕에 제자이자 친구인 귀암 이정을 떠나 보내면서 읊은 ‘그대 떠나가니 이 봄 누구와 더불어 놀꼬 새 울고 꽃은 떨어지니 물만 홀로 흐르네 이 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오니 훗날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 오리라’는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어 늘 발길을 머무르게 한다. 지금은 옛길이 물에 잠겨 석간대를 보려면 주차장에서 선착장으로 내려가야 한다.

      입구에 도착하니 문화유산해설사 김경숙(☎ 011-9597-6330)씨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도산서원은 영남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 선생이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촉감이 좋은 흙길로 들어서면 ‘추로지향’ 이라는 기념비가 있다. ‘중국의 맹자. 공자가 살았던 곳과 같이 안동은 예절과 학문이 빼어난 곳이다’라는 뜻으로 공자의 77대 후손이 500년 전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이어지는 모습에 감동하여 적은 것이다.

      서당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수양버들이 늘어진 그늘에 서면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에 작은 숲에 싸인 시사단이 있다. 1792년 정조가 선생의 학덕을 기리며. 영남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과거를 보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도산서원은 경사진 곳에 자리잡아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있어 위계질서가 매우 정연하다. 서원은 본래 후학을 가르치고 선현을 제사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므로 건물들도 그에 합당하게 구성되어 있다.

      대개 서원의 건물배치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앞쪽에는 배움의 터인 강당을 두고 뒤쪽에는 모시는 분의 사당을 두는 형식이다.

      '도산서당' 완락재·마루·부엌으로 구성

      연꽃 심고 샘 파고… 뜰에도 세심한 배려

      유생 기거 '농운정사' 직접 설계

      [도산서당]
      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은 이황이 본래 공부를 하던 서당구역이다. 서당 옆에 있는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가도 되지만 한 단 아래로 내려서 들어가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도산 서당은 온돌방인 완락재와 암서헌인 마루. 부엌을 합해 세 칸 집이다. 퇴계는 건물뿐 아니라 뜰에도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앞마당의 동쪽구석에 작은 연못을 파서 연꽃을 길렀고. 개울 건너에는 샘을 팠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작은 단을 쌓고 매화. 대. 소나무. 국화 등의 꽃과 나무를 심어두고 산책하며 즐겼다. 작은 뜰에 울타리를 만들지 않고 자연스레 뒷산과 이어지게 했는데. 산을 뜰의 연장선상에 두어 자연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정원으로 삼은 선생의 높은 자연관을 보여준다.

      [농운정사]
      도산서당 건너편에는 공부하는 유생들이 기거했던 8칸짜리 건물이 있다. 퇴계가 처음 지은 건물은 자신이 기거하는 도산서당과 이것뿐이다.

      제자들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으로 퇴계가 직접 설계한 평면이 ‘工 자’ 형식의 집이다. ‘工 자’ 형식의 평면은 뒷방 쪽에 햇빛이 들지 않아 일반 민가에서는 잘 짓지 않는데도. 짧은 처마를 사용하여 빛을 받도록 배려하면서까지 이 형식을 고집한 퇴계가 선생으로서 제자사랑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책 보관하는 동·서 광명실 지나면 보물 제210호 전교당

      마루에서 내려다보니 도산서원 한눈에

      [전교당]
      서당에서 더 오르면 양쪽으로 책을 보관하는 동·서 광명실이 있다. 이곳에는 907종 4천338권의 책과 퇴계가 소장하던 각종 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동·서 광명실을 지나면 진도문에 이르게 된다. 진도문으로 들어가면 서원의 중심공간으로 강학을 하는 보물 제210호 전교당이다.

      전교당 정면에는 선조가 조선 중기 명필 한석봉에게 명하여 쓴 ‘도산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양쪽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대칭으로 앉아 있고.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한 전교당 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경사진 대지 위에 자리한 도산서원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 이래 이상사회 건설에 뜻을 두었던 많은 사림을 배출해 낸 곳이다. 그러나 지금 도산서원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의미보다는 사진이나 한 장 찍고 관광지를 지나가듯이 겉모습만을 보고 지나치는 듯하여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다.

      원효대사 창건 '청량사' 의상대사 수도한 청량산 의상봉도 볼만

      [청량사]
      청량산 청량사로 가는 길에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옥수수와 눈부시게 흰꽃을 뽐내는 참깨가 고향의 정취를 자아내게 한다. 입석대에서 산길을 따라 바람소리 새소리를 벗삼아 이마의 땀을 씻으며 산비탈 오솔길을 택했다.

      우리 일행을 기다린 총무 운천 스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안내를 한다.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자리 잡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불교를 억압하는 주자학자들에 의해 절은 피폐하게 되어 현재는 청량사와 부속건물인 응진전만이 남아 있다.

      청량사의 유리보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청량산의 최고봉인 의상봉은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께서 입산수도한 곳이라 의상봉이라 불리며. 이곳을 비롯해 보살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이 있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등 12개의 대와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터가 있으니 명당이다.

      TIP. 맛집
      안동호 상류 도산서원 입구에 산장식당(☎ 054-855-6368)이 있다. 민물고기 음식 종류는 10가지가 넘는다. 안주인 김분남씨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끓여 주는 자연산 메기 매운탕은 7천원으로 회원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사이 정이 들었는지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인 부부가 아쉬운 손짓을 한다. 음식의 깊은 맛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정이 넘쳐야 그윽한 맛이 있다. (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마산제일고등학교 학생부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