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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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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힘을 빼는 삶- 이분헌(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24-05-02 19: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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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뜻한 봄 향기가 물씬한 오후 나절, 재치 있고 다정한 지인의 안부가 실려 왔다.

    “그림 하나 넣을 수 있는 빈 달력이 있어 휘리릭 그려 봤어요. 제 맘에 사랑나무 한 그루 있다고요.”

    ‘봄꽃 피는 날/ 난 알았습니다/ 내 마음에/ 사랑나무 한 그루/ 서 있다는 걸’

    용혜원의 시 ‘봄꽃 피는 날’ 일부를 캘리그래피로 적고 좌측 여백엔 수묵담채화로 매화를 그려 넣은 달력 한 장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공을 던지거나 칠 때도 힘을 빼야 멀리 보낼 수 있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를 때도 힘을 빼야 더 좋은 소리가 난다고 하듯이 국전 입상을 한 작가답게 그림 속에 힘 빼기가 잘 드러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문인화를 그려왔기에 간단한 서체와 그림에도 힘 빼기가 능숙하게 배어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일도 힘 빼기가 필요하다. 힘 빼기 조절이 잘된 작품의 행간은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감동을 준다. 그런 작품 하나 쓰고 싶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늦은 밤이거나 새벽까지 잠을 깨워 생각에 핏대를 올려 봐도 마른 갈증 해소할 시어는 찾지 못하고 덜커덕 군더더기 말만 목구멍에 걸리고 만다. 알맹이가 없고 힘만 잔뜩 들어간 건조한 글을 다시 들여다보며 글쓰기가 멀고도 먼 길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일상에서 힘 빼는 일도 여간 녹록하지 않다. 끊임없이 달려온 어제의 배턴을 무심결에 또 이어받아 쉼 없이 달려온 날들. 온몸에 힘이 한가득 들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면 목에서 불규칙한 모래알 구르는 소리가 난다. 생의 몇 굽이를 넘어도 일상을 유연하게 녹여내는 일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개운하지 않은 생각들로 산만해질 땐 가만히 찻잔 앞에 앉는다. 찻잎 속살 우려내는 눈매 고운 잔 속에 일렁이는 흠결 몇 점 풀어 넣고 한 모금 또 한 모금씩 성근 나를 비우면 아집의 찌꺼기가 하나둘 가라앉고 마음결이 가벼워진다.

    바람의 손길이 부드러워지거나 햇살 맑은 날에는 가볍게 둘레길을 걸어본다. 길섶의 키 작은 풀꽃들, 싱그런 잎들이 무작정 손을 내밀고 눈맞춤을 해 준다. 제 몸 하나 살아갈 작은 땅에 뿌리박고 살면서도 저렇게 유유자적하다니. 길 가는 이에게 조여진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보라고 묵언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다.

    힘을 뺀 삶은 평화롭고 아늑하다. 돌아보면 너무 힘을 주며 살아온 것 같다. 콧대를 세우며 눈에 힘을 주고, 이기적인 마음을 앞세운 불통의 뿔이 툭툭 솟는다. 불필요한 힘을 빼는 연습에 익숙해지면 저절로 마음이 낮춰지고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더욱 유연해지리라. 이제는 한 발 물러서서 힘을 빼는데 집중하여 성찰의 정원을 가꿔나가야겠다.

    이분헌(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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