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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가을을 믿다- 이영옥 시인(200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기사입력 : 2023-10-27 07: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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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고, 달력은 어느새 쓸쓸한 시월의 끝자락을 당겨온다. 등단 햇수를 따져보니 나의 글쓰기 여정도 가을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오늘은 산에 다녀올 계획이라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신간 두 권을 대출해 배낭 속에 넣었다. 나는 거의 십수 년을 집 근처 금정산을 올랐다. 함께 등산할 동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습관처럼 산에 오른다. 출발 전엔 항상 나 홀로 산행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있지만, 막상 산에 가면 혼자가 아님을 금방 알아챈다. 너무도 많은 아름답고 순수한 존재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기 전의 나와 산을 오른 뒤의 나는 확연히 달라져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를 켜고 한글파일을 열어놓으면 백색의 텅 빈 공포가 밀려든다. 과연 마음먹은 대로 글이 술술 풀릴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번민이나 불안이 노크하기 전에 자리를 훌훌 털고 산에 오르는 게 상책이다. 글쓰기가 그렇듯이 산은 처음부터 아름답고 귀한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며 땀을 비 오듯 쏟고, 헐떡이는 숨을 일정량 뱉은 후에야 대견하다고 등 두드려 주듯이 진귀한 야생화며 멋진 풍광을 선물한다.

    글쓰기의 매혹 못지않게 산은 각각의 계절마다 독특한 개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뺏아간다. 봄 산은 어떤가. 겨울을 견딘 거무죽죽한 마른 가지 위로 작은 연둣빛 발바닥을 종종종 내딛는 새싹의 걸음걸이는 여간 귀여운 게 아니다. 진달래가 필 때면 허공에 모셔다 둔 연분홍, 진분홍의 그리움이 점점이 떠있고 여름 산에서 어쩌다 소나기를 만나면 산이 뿜어내는 힘찬 생명력에 구질구질한 육체는 없어지고 한 줄기 맑은 바람으로 불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오늘 코스는 고당봉의 반대쪽인 양산 ‘석산마을’을 출발해 ‘질메쉼터’를 거쳐 해발 536m의 ‘다방봉’을 찍었다. 단풍이 불붙기 시작한 이 코스는 호젓한 숲길이 길게 뻗어있어 가을산행을 하기에 제격이다. 숲길은 바람과 낙엽이 협연하는 음악의 공간이기도 하다. 떨어진 낙엽은 바람을 타고 잠깐 흐른다. 그때 서로의 등을 스치며 내는 소리는 천상의 음계 같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나무계단을 올라 ‘다방봉’ 전망대에 서면, 저 멀리의 김해 평야와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해고도에 혼자 서있는 순간은 언제나 감격적이다. 내면 가득 깨끗하고 뜨거운 무엇이 고인다. 창작의 고통을 묵묵히 지나오다 보면 희열이 기다리듯이 말이다.

    그림자가 길어진 하산 길,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왕 발을 들여놓은 글쓰기의 길, 끝이 어디인지 알 순 없지만 때론 비상하고 때론 추락하며 점점 힘이 응축될 나의 가을을 믿는다. 이렇게 고운 계절이 끝없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영옥 시인(200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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