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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에세이] 달팽이- 정정화 소설가(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 기사입력 : 2023-06-15 20: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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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가 오고 난 뒤 녹음이 짙어진 강둑길을 걸었다. 하루에 한 번씩 걷는 일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내 삶은 지금보다 훨씬 무미건조했겠지.

    몇 년 전만 해도 길가에 개망초꽃이나 달맞이꽃이 많았는데, 요즘은 금계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금계국은 번식력이 좋아 이 계절에는 어디를 가도 흔히 보인다. 진노랑 꽃이 떼로 피어난 모습은 보일 듯 말 듯 피어있는 풀꽃에 비해 유독 눈에 띈다. 붉은 아스콘을 깐 땅바닥에는 약간의 물기가 남아 있었고 군데군데 달팽이가 기어 다녔다. 맑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달팽이가, 비가 온 후 길바닥이 축축하니까 많이들 나들이를 나왔다. 하지만, 그곳은 사람들의 산책로이자 자전거길이라 달팽이에게는 위험천만한 장소다. 달팽이 손님을 피하느라 땅바닥을 응시하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무심코 밟고 지나간 곳에는 달팽이의 사체가 제법 눈에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은 일일이 달팽이를 피하며 지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로 건너편 시멘트 길에는 달팽이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주위를 살피며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강물이 시원하게 흘러 내려갔다. 물가에는 작은 물새 두 마리가 날렵한 몸짓으로 오가며 다정함을 자랑했다. 철마다 피는 꽃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 중 하나이고, 계절마다 다른 새들이 강물을 누비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멀리 뭉게구름은 갖가지 동물 모양으로 변신하며 변화무쌍했다.

    길이 좁아지는 구간에서 되돌아오면서도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고요한 속삭임에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치유한다. 비를 맞고 불쑥 자란 싸리나무 이파리가 손짓하고, 한 뼘 크기만큼 더 자란 찔레가 튼실함을 과시한다. 향긋한 인동초 내음과 제방 건너 꿩 울음소리가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몸과 맘이 들판 가득 푸른 기운에 스며든다.

    다시 달팽이가 많은 길로 접어들었다. 바짝 긴장하며 달팽이를 밟지 않고 걸으려 애썼다. 앞쪽에 한 여자가 걸어왔다. 가까이 왔을 때 발로 뭔가를 풀숲 속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잘 안되는지 재차 밀어내는 동작을 하는데 자세히 보니 달팽이를 길 바깥으로 옮기는 거였다. 풀숲에서 이제 막 길 위로 올라온 달팽이인 듯했다. 그 여자의 행동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소극적으로 달팽이를 피하며 다녔다면, 그녀는 적극적으로 달팽이를 살리는 행동을 한 것이다. 여자의 배려심에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물론 길 가운데에 있는 수백 마리나 됨직한 달팽이를 다 옮기지는 못할지라도 한 마리라도 살리려는 마음이 고마웠다.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생명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나도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길 가운데쯤에 있는 달팽이 한 마리를 손으로 집어 풀잎 위에 올렸다. 갑작스러운 이동에 영문을 모르는 달팽이가 빨판을 내밀어 겨우 몸을 지탱했다. 풀숲이 유난히 푸르게 빛났다.

    정정화 소설가(201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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