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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여백의 미학 -서일옥 시조시인(1990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 기사입력 : 2023-04-13 19: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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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미술의 세계적인 거장이자 철학자 이우환은 여백에서 시작하여 여백에서 마무리되는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다. 점 하나, 선 하나만 찍혀 있어 최소한의 표현과 여백의 미를 담은 그의 그림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있다. 점은 그림이 아니라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인식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표식일 뿐이고 그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많은 공간을 빈 채로 남겨 두어 그려지지 않은 부분, 만들어지지 않은 부분을 한 공간으로 여겨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묵향 가득하고 고고한 멋이 살아 숨 쉬는 한국화의 특징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백의 미를 빼놓을 수 없다. 화면 한쪽을 넓게 비워놓기도 하고 형체 사이사이를 좁게 비우기도 한다. 조선 후기 김홍도의 ‘관폭도’ 를 보면 선비들이 모여있는 곳과 산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석구석이 비어 있고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조차도 형태를 그리는 대신 여백으로 표현하였다. 역시 그 그림을 감상할 때도 빈 부분을 작품의 한 공간으로 생각하여 감상하면서 전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남아있는 여백에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조 작품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모란 / 이영도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위 작품은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지만 극히 담백하고 절제된 표현들이 오히려 더 많은 그리움을 자아내게 하는 단시조이다. 좋은 시조는 행간 속에서 말이 거느리는 여운이 직접적인 표현보다 더 깊은 생각을 길어 올리는 샘물같은 것이어야 한다. 여백의 확대를 통한 효과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의 관계에서도 여백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 가진 모두를 보이거나 말로 다 표현하고 행동해 버리면 상대방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없다.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며 상대방을 배려하고 감정을 절제하며 꼭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은 남겨 두어 서서히 스며들게 해야만 그 관계가 오래가고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내 삶의 여정을 돌아보면 설정해 놓은 목표를 꼭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감과 남보다 더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앞뒤 돌아보지 않고 바둥대며 살아온 것 같다. 그것을 열정이라 생각했고 성공이라 믿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결코 잘 살아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제는 하나, 둘 명패를 내려놓을 시간이다. 그저 담담하게 흘러가는 물을 보며 물멍하고 저녁 하늘을 서서히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바람과 나무의 맑은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비워야겠다. 그 여백에 여유로움과 너그러움과 감사함을 앉히며 살아가야겠다.

    서일옥 시조시인(1990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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