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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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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고구마에는 시심이 있다- 권영유(시인·2023년 본지 신춘문예 시 당선)

  • 기사입력 : 2023-03-09 19: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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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니 소심했던 성격이 많이 밝아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 쓰기는 느리지만 천천히 자신만의 마음 밭을 일구는 것이다. 돌아보니 틈틈이 일기를 썼고 습작을 했던 것 같다. 시 쓰기를 포기했다가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던 건 마음 행간에 심어놓은 시심 때문일 것이다.

    20년 전 아파트 옆 자투리땅에 텃밭을 가꾼 적 있다. 처음에는 상추 가지 깻잎 모종을 심다가 한두 해 지나서는 평소 좋아하는 고구마를 심었다. 챙 모자 쓰고 목에 수건 두르고 목장갑 낀 채 밭으로 향하곤 했다. 호미 들고 고랑의 잡초들 캐낼 때마다 덥고 힘들었지만, 나 자신이 스스로 노력한다는 그 자체가 좋았다.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유난히 눈이 크고 마음이 고운 순이와 단짝이었다. 어느 날 농번기가 되면 일손이 부족하다고, 고구마순도 따고, 고추도 따야 한다는 말에 덜컥 내가 도와줄게 하고 나섰다. 그리고는 여름방학 때 일손 도우러 순이네 집에 2박3일 머물기로 했다. 첫날 부모님께 인사드린 뒤 순이와 밭에 나섰다.

    막상 가보니 땡볕이라 일하는 것보다 나무 그늘에 머무는 게 더 길었다. 점심상 차렸을 거라고 일어서면 푸짐한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 후에는 마음껏 먹으라고 소쿠리 가득 고구마를 삶아 놓으셨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도와드린다고 했지만 제대로 도움이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스 타는 데까지 배웅 나온 순이가 귀엣말로 들려준 말, 그렇게 맛있게 먹었는데도 살이 하나도 안 쪄서 간다고 어머니가 도리어 미안해하셨단다. 그때 내가 순이네 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한 것은 일기쓰기였다.

    우리나라도 한때 먹을 게 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마다 추수한 곡식을 곳간에 쟁여두고 겨우내 꺼내 먹던 집이 많았다. 나는 그 집 중에 고구마가 가득 들어 있는 저장고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오랜만에 재래시장에 들렀다. 나는 유독 고구마 담긴 박스들에 눈이 갔다. 무거울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느새 지폐를 건네고 있었다. 사각으로 끈이 둘러진 박스를 들고 가다 내려놓길 여러 번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한 솥 가득히 고구마를 담고 쪘다. 모락모락 나는 달큼한 김이 집안에 자욱했다. 호호 불어가며 껍질 벗겨 한 입 베어 물 때 그 맛이란. 요즘 옛 향수에 젖듯, 시 쓰기도 과거를 다시금 수확하는 것과 같다. 그 아련한 기억이 나의 정서가 되고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따라 순이가 보고 싶다. 아마 나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내 편을 들어줄 것이다. 넌 얼굴이 작아 표시가 안 나. 휴대폰 전화번호를 뒤져 전화를 걸었다. 순이야, 지금도 너는 눈이 크고 곱니? 내가 꿀고구마 한 박스 부쳐줄게…. 순이에게 보낼 택배상자에 신춘문예 당선된 신문을 오려 보내야겠다.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권영유(시인 2023년 본지 신춘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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