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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기억을 바꾸는 힘- 이상희(소설가·2023년 본지 신춘문예 소설 당선)

  • 기사입력 : 2023-03-02 19: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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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년 전 한 블로그 플랫폼에서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 짧은 소설을 연재했다. 글만으로는 섬마을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아 초등학생 딸에게 그림을 부탁했다. 딸의 상상 속 섬마을은 마치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맑았다. 그렇게 딸과 나의 합작품이 세상에 공개됐다.

    글을 올린 첫날, 휴대전화에 알림음이 울렸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준 것이다. 도대체 어떤 한가한 사람이 내 글을 읽은 걸까? 아이디를 클릭해 들어가 보니 30대 초등학교 교사의 삶이 글 속에 담겨 있었다. 나는 완전한 타인과 내가 글을 통해 연결될 수 있음이 신기했다. 글을 쓰는 일이 자신과 타인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 그들을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소설을 쓰는 나에게 힘이 됐다.

    새벽까지 작업을 하느라 아침밥을 차려주지 못할 때면, 글 쓰는 일의 무용함에 대해 생각했다. 맞벌이를 거부하며 꿋꿋이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과연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글은 매번 자기만족으로 끝난다는 운명을 생각하며 무기력해졌을 때 플랫폼에 글을 연재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내게는 어릴 적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필름을 잘라낸 것처럼 인생이 연결되지 않는 기분이 들 때면 두 다리가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내 일부를 잃었다는 상실감은 내내 석연치 않게 마음에 남아 있었다. 쓰는 일은 기억해 내는 일과 같았다. 플랫폼에 올릴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음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내 것을 기억하는 건 어려웠지만 주인공 호야의 어린 시절은 상상해낼 수 있었다. 괴롭고 힘든 감정을 배재한, 순수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소설의 힘이었다.

    술 때문에 자주 다투던 부모님, 얄궂은 섬 날씨가 내 마음의 창을 뿌옇게 만들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물처럼 연결되기 시작하자 내 마음의 창도 밝아졌다. 창안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일상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보였고, 그 속에 손을 뻗어 빛나는 보물을 주워올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던 부모님의 사랑. 그것이 가장 큰 수확물이었다. 덕분에 나는 기억을 바꾼 행운아가 되었다.

    올해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되자,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거나 노트북에 앉아 있어도 가족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집안일이 하기 싫을 때 가끔 악용(?)하기도 하지만 그러함에도 이해해주는 가족에게 감사하다. 나 그리고 타인에게 무용하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이상희(소설가2023년 본지 신춘문예 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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