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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12월, 死色과 思索 사이- 도희주(동화작가)

  • 기사입력 : 2021-12-09 20: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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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집 달력은 넘기는 게 아니라 매월 뜯어내는 식이다. 며칠 전 11월을 뜯어내려고 별생각 없이 달력 앞에 섰다가 멈칫했다. 비현실적인 상상이 떠올랐다. 이 뒤엔 마지막 남은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올해 12월은 어떤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결제하지 못한 계산서 한 움큼 쥐고 빚쟁이처럼 벼르고 있을까. 아직 마무리 덜된 일감 쌓아놓고 악덕업자처럼 험상궂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갑자기 달력을 뜯기가 싫다.

    11월 달력을 뜯지 않는다고 11월이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달력을 떼기가 정말 싫다. 뭘 했다고 벌써 한 해의 마지막과 대면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부터 남아있는 12월 달력을 바라보면서 한 달 내내 자책하고 죽을상을 지으며 지내기는 싫다.

    어떻게 된 게 해가 갈수록 해결해야 할 문제의 부피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나는 것만 같다. 중년이 넘어가고 장년에 들쯤이면 아이들도 웬만큼 커서 제 앞가림을 하고, 치열하게 살아냈던 일들도 조금씩 마무리하면서 시간여유를 가질 줄 알았다.

    적든 많든 개미처럼 곳간에 쌓아둔 곡식 아껴 먹으면서 가까운 데 여행도 다니고 음악회나 미술관도 찾으면서 최소한 괜찮은 서민적 여유 정도는 만끽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름 괜찮은 문화생산자로서 역할을 다하며 최소한 지역에서 적절한 대접도 받는 목표선 언저리에 도달해 있을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근데 나는 아직 삶의 변변한 결과 하나 만들지 못하고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다. 솔직히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 나와 별 다를 바 없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내일모레 환갑을 바라보면서도 다들 아직은 아득바득한다.

    스무 살 때 상상했던 오십 대의 나는 이런 ‘나’가 아니었다. 서른 살에 상상했던 오십 대의 나도 이런 ‘나’가 아니었다. 마흔 살쯤엔 상상하면서 조금 불안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이런 ‘나’가 될 것 같아서다. 그리고 갑갑하게도 지금 그런 ‘나’가 돼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지금의 ‘나’가 아득바득대면서 상상하는 육십 대의 ‘나’나 칠십 대의 ‘나’가, 내가 불안하게 상상하는 그런 ‘나’라면 절망이다.

    직접 볶은 원두커피를 내린다. 습관적으로 약간 연하게 마신다. 오늘따라 쓰다. 그때 화다닥 떠오르는 생각. 인생은 습관에 의해 유지되는 것 아닐까. 24시간 생각을 풀가동하고 살아야한다면 두뇌에 부화가 걸려 터질 것 같다. 문제가 발생하면 두뇌를 가동하지만 평소엔 습관에 의해 일상이 진행되는 게 인생일 것 같다. 11월과 12월은 뭐가 다른가.

    1년 내내 별생각 없이 잘 지내오다가 연말이라고 괜히 혼자 思索하다가 死色이 되다니 바보짓이다. 11월을 북 뜯었다. 12월이 얼굴을 드러낸다. 아무 표정 없다. 그렇지. 마음 가라앉히니 커피향이 느껴진다. 생각을 달리하면 12월은 새해 1월을 시작하기 전의 준비시간일 수도 있다.

    가끔 우리는 시간의 단위를 인위적으로 표시해둔 시계나 달력을 보며 심각해질 때가 있다. 지금도 누군가 마지막 달력을 보며 한숨 쉬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12월은 지나가는 해의 우울한 마지막이 아니라 신년을 위한 산뜻한 출발 준비점이라고. 다음 단계의 나를 만들어가는 데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도희주(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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