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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9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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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검은 희망- 이서린(시인)

  • 기사입력 : 2010-01-2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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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한복판.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재수 없게, 혹은 억수로 운 좋게 물결에 떠밀려, 다리 난간 아래 아주 작은 섬에 몸이 실려 살아난 남자. 그때부터 남자 김씨의 무인도 아닌 무인도 밤섬 생활이 시작된다. 죽고자 했으나, 이 더러운 세상 내가 떠나고 말지 했으나 어쩌나. 죽는 것도 여의치 않은 재수 없는(?) 사나이.

    기왕(?) 살아난 거. 바로 코앞에 보이는 63빌딩과 익숙한 빌딩들이 보이는 육지로 가려 하나 갈 길이 없다.

    다리 교각은 엄청 높고 올라갈 수 있는 설치물도 없다. 차들이 씽씽 달리니 아무리 고함을 쳐도 들리지 않는다. 어쩌다 한강을 지나는 배가 있어도 그를 미처 못 보거나 설사 본다 해도 같이 손을 흔드는 관광객뿐. 배터리가 다 되어 가는 휴대폰으로 119에 전화를 거나 무인도라 하자 장난인 줄 알고 끊는다. 그리고 배터리 완전 방전.

    구조를 체념하자 버려진 것들이 하나 둘 그에게서 쓸모 있는 것으로 변해 간다. 망가진 오리 모양 배, 토마토 케첩 깡통, 찌그러진 냄비, 포크 등등.

    심심하다가 외롭다가 미치도록 고독한 시간이 그를 에워싼다.

    그러다가 발견한 짜파게티 빈 봉지. 양념 없이 물고기와 새를 잡아 구워 먹다가 얻게 된 인스턴트 자장면 스프는, 그때부터 그에게 세상에 대한, 뭍에 대한, 복잡한 도시에 대한, 세상 모든 맛에 대한 희망이 된다.

    새의 똥에서 갖가지 씨앗을 구해 밭을 만들어 심고 그리고 싹이 나오고. 옥수수가 자라고 그의 희망도 자란다. 밤섬 모래밭에 쓴 HELP가 HELLO로 바뀌고….

    여자는 도시 속의 섬에 자신을 가둔 지 몇 년째다.

    식구들과도 단절한 채 서울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자기 방에 자물쇠를 채워놓고, 붙박이장 안에서 공기가 든 엠보싱 비닐을 깔고 잔다. 눈 뜨면 컴퓨터 켜서 하루 종일 매달리며 가상의 공간에서 생활한다.

    만보기를 차고 방안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유일한 취미로 달을 찍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카메라 망원렌즈로 발견한 모래밭의 글자 HELP. 그리고 며칠 뒤에 바뀐 단어 HELLO.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소통의 방식인 빈 와인병과 모래밭. 여자 김씨는 남자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다가 그가 얼마나 자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된다.

    우리나라 자장면은 어디든 못 가는 데가 없지 않은가. 여자는 밤섬으로 여러 종류의 자장면을 배달시켜 준다. 배를 타고 배달된 자장면. 그러나 망설이다 단호히 거절하는 남자.

    다시 아파트로 찾아온 배달부가 여자에게 남자의 말을 전한다. 자장면은 그에게 그냥 자장면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그렇다. 태풍과 외로움과 배고픔과 싸우는 그에게 자장면은 음식이 아니라 희망이다.

    오래된 스프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자기가 기른 옥수수를 가루 내어 반죽하여 마침내 면을 완성시킨다. 성스럽게 스프 봉지를 뜯어 삶은 면 위에 뿌린다. 검은 가루가 쏟아진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자장면을 먹는 남자. 엉엉 울어가며 희망을 먹는 남자. 몇 개월 만에 간이 된 음식을 먹는 남자.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만나는 두 사람. 관심과 사랑이 그들을 세상 속으로, 사람들 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이다. 2009년 작, 이해준 감독, 정재영, 정려원 주연의 영화 ‘김씨 표류기’.

    곧 졸업과 입학의 날들이 올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 우리 세대가 학창인 시절.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과 새 출발에 대한 기대로 먹은 것은 주로 자장면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봐, 친구. 오늘 자장면 한 그릇, 아니 희망 한 그릇 어때?

    이서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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