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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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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석굴암 가는 길- 전명희(수필가)

  • 기사입력 : 2009-12-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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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 고도 경주로 들어서는 길은 초입부터 다른 도시들과 다르다. 검은 기와가 얹혀진 톨게이트는 선대의 귀한 위엄이 느껴져 절로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길 한쪽의 작은 돌조각상들도 옛 세월의 무연한 흔적인 양 눈에 띄었다. 녹록잖은 세월을 알리는 것은 길가의 벚나무도 마찬가지다. 휘늘어진 육중한 가지들과 옹이 박힌 뒤틀린 줄기들은 꽃이 없어도 진한 향이 느껴질 듯하다.

    차에서 내려 표를 사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가족의 손을 잡으며 석굴암을 찾아 가는 길. 석굴암이 가까울수록 우리도 속세로부터 그만큼 벗어나고 있었다. 누군가 곱게 쓸어 놓은 길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어느댁의 사랑 마당을 내딛는 듯하고 깊이 들어설수록 울창한 소나무 숲이 절경이다.

    오천년 이상을 산다는 나무의 영혼이 아니어도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아우르며 기원하는 자태의 소나무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주는 신령스런 영물임에 틀림없다. 그 옛날 경주인들이 그랬듯 여기 현대의 또 한 가족이 속세의 틈을 비집고 신성의 숨결과 인간적인 효심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기특한 마음을 아는 듯 손바닥만한 줄무늬 다람쥐가 쪼르르 내려와 고개를 까딱하고 맞은편 산으로 올라간다. 커다란 돌담 사이사이 앙증맞은 푸른 고비들도 갸름한 손을 모두어 합장을 취한다.

    자연도 불심을 이어받아 예사롭지 않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석굴암 본존불 앞에 섰다. 한점 한점 깎고 새긴 염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부처가 되고 예술이 되어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내 앞에 있다. 보존을 위해 유리막을 세우고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경고메시지는 참으로 아쉽다. 오로지 한 마음 한 정신으로 수양하여 마침내 불심과 효심이 영혼 깊숙이 깃들려는 찰나 누군가 어깨를 흔들며 소중한 영감을 가로채간 듯,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직접 만지고 귀 기울이며 사진으로 담는다면 영혼이 더 말개지고 고요해질까.

    다시 생각하니 부처님의 계신 자리와 죄많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이렇게 뚜렷한 구분이 있음이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다. 너나없이 만지고 비비고 베껴간들 저 속에 스민 티 없는 불심의 단 한점이라도 얻어갈까만 이만한 간격으로써 거리를 두었기에 오늘날까지 길이길이 빛날 신비로움과 견고한 자태가 보존될 수 있었으리라.

    이 위대한 실물을 시작한 이를 생각해본다. 그의 시대 화려했던 불교의 융성기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님의 공덕과 왕생극락을 염원하며 불국사와 석굴암을 기초했다니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모를 향한 공경심과 내세에의 소망은 삶의 원천이요 초발심의 근간이 아닌가 싶다. 살아생전 완성을 보지 못하고 가는 마음이 어땠을까마는 죽음마저 고이 스며 신비로움은 더하다. 한 인간이 그 부모에게 피를 이어받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씨앗 하나 흙에 떨어져 생명을 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무가, 달리 원없이 잎을 늘리고 줄기를 키워가듯 인간도, 하루하루 사는 일에 충실하면 그도 족한 일. 이 덧없는 중생과 다른 얼마나 지극한 효심이 있었기에 이 원대한 작업을 시작하고 죽음으로써 마지막 원을 보탰을까. 나는 그를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상징, 효성의 부처로 이름 붙이고 싶다.

    석굴암을 찾아가는 길, 그 길은 숭고한 인간성과 신성을 범접하는 길이었다. 여기 무심으로 깊어지고 일심으로 뻗어오른 나무들은 한 그루 한 그루 장차 신을 영접할 사람들에게 속세의 물든 욕망을 씻어주며 불심 깊은 화두가 되고 범패가 되어 지나는 길손을 맞이해 주었다.

    이제 숲은 제 할 도리를 다 했다는 듯 한걸음 물러나 우리를 바라본다. 누구든 석굴암을 찾는다면 석굴암 가는 길 위에 가능한 오래오래 머물러라. 발길을 최대한 더디 하며 그 시대와 대자연에 마음을 열고 사색에 잠기노라면 어느 순간 이 현세와는 다른 세상에 서 있음을 느끼게 되리라.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 끝내 석굴암을 보지 못해도 석굴암이 거기 선 본래 의미와 신비로움은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제 마음속의 석굴암(효성과 신앙심)은 더 빛을 발해 본존불의 자애로운 미소만큼이나 영혼은 청정해지고 천년 전의 향기에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전명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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