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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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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김지하칼럼] 나 혼자만의 비밀

  • 기사입력 : 2009-06-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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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혼자만의 비밀이 하나 있다. 아무도 모른다. 아니 모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렇게 공개하는 것은 까닭이 있어서다. 무엇일까. 다 알다시피 나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다. 결혼할 때 분명 아내에게 반지를 손에 끼워 주었다. 그것은 약속이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약속일까?

    나는 최근 우리의 수천년 전 고전인 ‘천부경(天符經)’을 새롭게 해석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 목적이 있어서다. ‘개벽(開闢)’, 더욱이 ‘화엄개벽(華嚴開闢)’의 역학(易學)적 실천을 위해서는 동아시아 전래의 복희역(伏羲易), 문왕역(文王易), 정역(正易)과 함께 내가 10년 전 부산 해운대 등탑암(燈塔庵)에 머물 때 어느 날 문득 허공에서 본 새로운 팔괘인 등탑역(燈塔易)을 모두 다 천부경 안에서 종합하는 ‘오역(五易)’작업을 위해서다.

    물론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기쁨인 것은 그 모든 역리(易理)가 천부경 후반의 기이한 한마디인 ‘묘연(妙衍)’에 의해 집약되고 풀려나간다는 점이고 더욱이 그 묘연이 나의 미학적 클리세인 ‘흰 그늘’과 함께 여성성, 모성의 우주생명학적 비의(秘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나는 얼마 전 이 공부를 더 본격화하기 위해 화엄성지(華嚴聖地)라고 불리는 오대산에 들어간 적이 있다. 산속에서 공부하다가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바로 이 묘연의 뜻 가운데 ‘반지’가 들어 있음을 깨닫고 또 이어서 이 반지에 얽힌 나의 한 옛 꿈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꿈은 이렇다. 꿈에 어느 참으로 아름답고 고매한 한 귀부인이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뒤 내게 사랑의 약속으로 반지를 사서 끼워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유혹적인 순간이었음에도 왠일인지 나는 순식간에 가볍게 이를 거절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도, 비록 꿈이었지만 그 거절의 이유가 내게 잘 짚이질 않았는데 이날 새벽녘 그 이유가 내 심장에 뚜렷이 떠오른 것이다. 무엇이었을까?

    하기야 내가 이 꿈을 기억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반지’라는 말이 늘 ‘약속’이란 말로 바뀌어서 기억되곤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반지’가 ‘약속’으로서 묘연의 가장 중요한 참뜻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 약속, 즉 그 반지를 꿈에 그 여자에게 끼워주었다면 나는 그때 즉사했을 것이란 생각도 이어 떠올랐다.

    즉사라? 즉사라? 즉사라? 무슨 즉사겠는가마는 인격적 파탄 같은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왜 그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을까? 꿈에 불과한 일인데 말이다.

    그 아침 동터 올 무렵 창문을 열었을 때 해맑은 새소리들과 함께 ‘반지’는 일부일처제의 제약이나 규범 따위에 결코 한정되지 않는, 그야말로 오래고 오랜 우주생명의 큰 비밀의 상징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래서 진정한 약속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결혼 때 반지를 그 징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무슨 비밀일까?

    우리는 영화 ‘반지의 제왕’을 잘 안다. 그 스토리까지도 대개들 환히 알고 있다. 반지를 악마의 고리로 보아 폐기시키기 위한 처절한 사투의 과정이 인류정신사, 문명사의 진보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진실이었을까? 도리어 거꾸로가 아닌가? 반지의 폐기의 역사는 인류정신사의 퇴보의 시작, 즉사의 시작, 인격적 파탄의 시작은 아니었을까?

    쉽게 알려진 대로라면 반지는 우선 비선형(非線形)적 시간관이요 자기회귀의 생명관이며 이른바 우로보로스(Ouroboros) 또는 불교에서 ‘용화(龍化)’라고 불리는 고대 여성상위의 남녀평등관의 상징적 부호다.

    ‘여성상위’라 했다. 그것은 모성이나 자애로움, 사랑, 그리고 성(性)적 교호관계 그 자체 안에 들어 있는 신령한 세계이탈의 상징이었다.

    바로 그것이 ‘묘연’이란 뜻이다. ‘오묘한 물 가득 고인 연못’이 곧 묘연인데 이것이 곧 반지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것이 이제 새로운 시대의 동아시아의 세계 비전, ‘화엄개벽’의 요체인 오역의 열쇠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역시 나 혼자만의 비밀로 그냥 간직하는 게 나을 뻔했다.

    하지만 이 좋은 이야기를 혹시라도 요즈음 내게 한없이 쌀쌀맞은 내 아내가 듣고, 혹시라도, 단 한번이라는 방긋 흰 그늘 같은, 하얗고도 그윽한 미소를 내게 보여줬으면 하는 은근한 마음에서 주책없이 공개했다. 허허허, 역시 묘연이다!

    시 인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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