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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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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텃밭과 울력- 김형엽(시인)

  • 기사입력 : 2009-06-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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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 전, 우리 가족은 전남 해남 땅을 밟았다. 무량한 봄빛에 몸을 뒤척이는 남도의 붉은 흙을 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그 위로 흘러내리듯 피어나는 온갖 꽃들의 놀음에 한바탕 취해 보고도 싶었다. 우리가 해남 땅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달마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 미황사를 가기 위해서였다.

    저녁 무렵에야 해남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낙조가 함께하는 산사의 저녁풍경을 내심 기대하기도 했지만 피곤해 하는 아이들의 기색에 하는 수 없이 사하촌 작은 민박집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미황사로 올라갔다.

    초기 템플스테이 문화를 개척하고 정착시킨 사찰로 유명한 미황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사찰 중의 하나로 꼽힌다. 소담한 경내에서 풍기는 아름다움과 절에서 바라다보이는 올망졸망한 다도해의 풍경이 어우러져 깊고 적막한 산사의 운치를 한층 더해주는 것 같았다.

    아침 8시, 뻐꾸기 맑은 울음소리가 달마산에 봄물 들이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미황사 대웅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뜻밖에도 비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템플스테이를 한 사람들과 이곳 스님들이 함께 울력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울력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노동을 한다는 뜻의 순우리말인 울력은 여러 사람의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에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는데, 선종에서 중요한 수행 방법으로 여겨왔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선사의 이 말은 수행자들의 하루 일과에서 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얼마 후 마당 쓸기 울력이 끝났다. 사람들이 남겨 둔 발자국은 모두 없어지고 어리고 착한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흔적만 남은 마당을 보며 나는 문득 마음이 뭉클해졌다. 울력에 참가한 사람들이 마당을 쓸며 제 마음도 함께 닦는구나 싶었는데, 그들이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이곳 땅끝 마을까지 끌고 온 내 모든 번뇌들이 점점 희미해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게 그 빗자루 표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울림이 큰 묵언의 경전이었던 것이다.

    자기 내면을 닦는 일이 곧 타인의 내면도 맑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돌아온 날 저녁, 나는 한 평 남짓한 집 앞 텃밭으로 두 딸과 남편을 불러 모았다. 지금까지 텃밭 가꾸는 일은 줄곧 남편과 내가 해왔지만 이제부터는 아이들까지도 동참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 하루에 한 번은 텃밭에 들러 물을 주거나 풀을 뽑을 것을 제안했다. 어느새 고학년이 된 큰 딸은 입이 퉁퉁 부어올랐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이라도 돕겠다고 했다.

    우리 식구가 작은 구름떼처럼 한 이랑씩을 차지하고 앉아 풀을 뽑거나 물을 주는 저녁 시간, 나는 이 시간 앞에서 매번 소박한 행복감을 느낀다. 맨발로 흙을 밟으며 풀을 뽑는 일은 불쑥불쑥 일어나는 내 헛된 욕망을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고, 물을 주는 일은 번뇌로 일렁이는 나의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 시간 이웃해 있는 텃밭 주인과 주고받는 짧은 대화는 얼마나 푸르고 싱싱한지, 어지러운 세상사는 그 순간, 그 자리를 감히 침범하지 못한다. 오직 나누고 싶은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만이 저녁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출 뿐이다.

    요즘 신문이나 TV뉴스 보기가 싫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연일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에다 남의 탓만 해대는 높으신 분들의 얼굴이 그다지 달갑지가 않다. 자기를 들여다보기에 앞서 상대방을 공략하기에 바쁜 사람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울력’이라는 노동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조용히 묵언한 채로 한 가지 노동을 함께하다 보면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서로의 마음이 서로에게 번지지 않을까. 그래서 대치하기보다는 좀 더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지 않을까. 그들이 함께 비질을 하고 난 후, 잔잔한 물결처럼 앉은 빗자루 무늬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이 될까.

    김형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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