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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동짓달 기나긴 밤, 연인에게 시를 짓고 노래하다 - 서정매 (한국민속음악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 2023-12-27 21: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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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 올해 동지는 음력 11월 10일로, 애동지(兒冬至)였다. 밤이 가장 긴 동짓날을 보낼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정든 님 오신 날 밤에 굽이굽이 펴리라.’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마음을 풀어낸, 그러면서도 문장력이 빼어나기 그지없는 황진이의 시조다. 황진이는 누구를 생각하며 이 시를 지었을까? 황진이가 쓴 여러 편의 시는 여러 일화와 함께 전해지는데, 그중 형조판서·호조판서·병조판서를 역임한 조선 전기의 문인 소세양(1486~1562)과의 일화를 손꼽을 수 있다.

    송도의 명물 황진이의 소문을 들은 소세양이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송도 최고의 여인 황진이와 한 달을 함께 보내어도 나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마음이 흔들리면, 나는 남자가 아니다.’ 이후 30일간 황진이와 계약 동거에 들어간 소세양은 마지막 날 밤, 황진이와 이별의 시를 나누던 중 황진이의 빼어난 시에 탄복하곤, ‘나는 남자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인정해 버렸다. 친구들에게 놀림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한 것이다. 이처럼 솔직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도 대단하지만, 그런 소세양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황진이야말로 실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소세양에게 쓴 황진이의 한시를 풀이하면 이러하다.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구나/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흐르는 물은 거문고 소리처럼 차갑고/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는 이처럼 한시(漢詩)를 쓰기도 했지만, 한글로 된 45자 내외로 이루어진 시조도 빼어났다. 황진이의 시와 시조는 우리나라 3대 시조집으로 일컫는 청구영언(1728), 해동가요(1762), 가곡원류(1876) 등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시조는 6편이 전해진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다가〉,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니〉,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속였관데〉 등이다.

    예로부터 시조는 시조창, 즉 노래로 불러왔다. 시조창은 한국 전통의 가곡, 가사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성악 장르로, 실내(방)에서 이루어진 성악곡, 즉 실내악(chamber music)이다. 그리고 가곡·가사·시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것은 ‘가곡’이다. 즉 가곡이 먼저 노래된 후에 시조, 가사가 나왔다. 그런데 가곡과 시조창은 가사가 시조로 이루어져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음악적으로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가곡이라고 하면 ‘산유화,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 등을 떠올리는데, 이는 1920년대 이후에 작시, 작곡한 근대 음악 장르이다. 이에 반해 한국 전통 가곡은 선비들이 모여서 음악과 시를 즐기던 공간인 풍류방에서 이루어진 성악곡으로, 반드시 반주악기가 동원된다. 그것도 장구, 북 등의 타악기 반주가 아니라 대금, 피리, 가야금, 거문고, 해금, 장고 등의 관현악 반주가 수반되며, 전문 악사들에 의해 전주, 간주, 후주가 연주된다. 매우 체계적인 성악 장르이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기생과 악사는 모두 천민인 반면, 노래를 듣는 이들은 양반들이었다. 풍류방,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양반과 천민이 눈을 마주 보며 즐길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시조창은 반주가 생략되고, 장단·음정이 축소되고 창법도 변화되어 가곡에 비해 쉽게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종장의 마지막 구절은 과감히 생략한다. 예를 들어 〈동짓달 기나긴 밤〉의 마지막 구절인 ‘펴리라’는 시조창에서는 부르지 않는다. 시조창에서 이와 같은 마지막 가사의 생략은 한국음악 특유의 종지(終止)적 특징을 담아낸 것으로, 침묵 속의 맥박, 여백의 진수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매 (한국민속음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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