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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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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가을에는 서둘러 가을의 일을 끝내라- 장석주(시인)

  • 기사입력 : 2023-11-30 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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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풍은 지고 천지간에는 쇠락과 소멸의 예감으로 가득 찬다. 곧 북풍의 계절이 다가온다. 한해살이풀들은 시들고 꽃대는 바스라지고 줄기는 바짝 마른 채 서걱거린다. 한해살이풀들은 씨앗을 떨군 채로 혹한을 견뎌내고 이듬해야 다시 꽃망울을 맺고 여린 잎을 피워낼 테다. 들에는 미처 거두지 못한 배추들 잎이 얼고 물러서 땅에 달라붙는다. 밤에는 어린 고라니들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울어댄다. 어린 고라니들은 태어나서 처음 맞는 추위에 잔뜩 겁을 먹은 것이다.

    봄여름은 만물이 싹을 틔우고, 뻗고, 피우고, 자라는 계절이다. 녹음은 울창하고 뭇 생명들은 번창한다. 밤엔 저 광활한 우주에서 날아온 별똥별이 공중에 빗금을 그으며 반짝하고 타오르다가 꺼진다. 전기 누전으로 불꽃이 튀듯 찰나로 반짝하다 이내 사라지는 것, 그게 우리 생이 아닌가? 네가 갈망하는 것을 거머쥘 수 없다면 오직 가질 수 있는 것과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갈망하라! 뜨겁게 갈망하고 죽을 듯이 꿈꿔라! 네 생명이 불타오르게 하라! 이것은 우리 생의 숭고한 명령이다.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고 좌절하더라도 포기하지 마라. 가을에는 시작보다 끝이 더 많아진다. 더는 헤매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가을철이면 어머니는 혼자서 배추 쉰 포기를 소금물에 절이고 속을 채워 김장을 담그셨다. 그 김장김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먹을 한 해 양식이었다. 붉은 석양이 번질 무렵 김장을 마친 어머니는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오려나 보다. 어머니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어머니가 스스로의 수고에 보내는 위로의 뜻이 담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우리는 김장을 담그지 않는다. 김장은 가을의 의례였는데, 그게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만큼 삶의 보람과 기쁨은 줄고 가슴에 허전함은 커진다.

    이 계절은 벗들과 수다를 떨고, 음식을 먹고 술잔을 높이 들며 흥겨움에 도취할 때가 아니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 숙고의 시간을 품어야 한다. 지금은 침잠의 계절, 기도의 계절, 은둔의 계절이다. 주말의 수도원을 찾아가 묵상과 기도로 충만한 시간을 가져도 좋다. 올해 오랜 우정이 깨져 등진 벗들은 몇이나 되나? 그동안 너의 잘못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은 없었는가? 무심코 뱉은 말로 남에게 상처 준 일은 없었는가? 뇌우와 바람을 뚫고 자나가던 날들은 흘러갔다. 가을엔 쓸쓸함과 고적함이 번성한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서둘러 가을의 일들을 끝내야 한다! 이 가을은 두 번 반복하지 않을 것이므로. 밤은 저만치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너도 나도 저 아가리를 향해 걸어간다. 생자필멸이란 단 하나 생의 진리다. 죽음이란 마른 잎처럼 바삭거리는 것. 우리는 가을의 언저리에서 쇠락하는 것들을 통해 그 진리의 한 조각을 엿볼 수가 있었다.

    파랑새를 찾아 헤맸으나 그것은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임을! 인생은 뒤돌아볼 때 이해되지만, 인간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는다. 아직도 너는 슬프고 외로우냐? 우리 모두 다 그렇다. 네가 가진 슬픔과 고독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양식이다. 이제 슬픔을 거두고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생의 고마움을 노래하자. 봄마다 모란과 작약 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다정하게 두를 팔을 가졌다는 것, 우정을 나눌 벗을 가졌다는 것, 이 녹색별에 와 살 수 있는 생명을 얻은 것, 한 생을 잘 살다 떠날 수 있다는 것, 잃은 것도 있지만 늘 얻은 게 더 많았다는 것. 오, 이 생에 감사해!

    우리에게 남은 가을은 곧 끝난다. 너는 가을의 남은 일들은 다 끝냈는가? 곧 진눈깨비 내리치고 삭풍이 분다. 밤은 깊고 길게 머문다. 폭설이 퍼붓는 밤엔 두터운 눈구름에 가려서 별들을 볼 수가 없다. 혹한으로 모든 게 얼어붙는 밤에는 먹잇감을 구하려고 인가까지 내려온 야생동물도 두엇 생겨난다. 추위로 오소소 팔뚝에 소름이 돋는 아침, 하얀 눈밭에 상형문자처럼 찍힌 너구리와 오소리들의 발자국들이 남아 있을 테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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