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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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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에세이] 기다림으로 쓰다 - 김희숙 (수필가·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 기사입력 : 2023-05-18 20: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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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날, 우연히 들른 공방에서 처음 만났다. 은은하게 파고드는 빛깔이 단박에 마음을 끌었다. 푸른 바다도 스치고 파란 하늘도 보이고 초록 나뭇잎도 떠오르는 쪽빛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염색 장인은 한여름이라야 쪽물을 들일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흘렸으나 말을 붙잡아 달력으로 옮기고 때를 맞췄다. 쪽풀이 빨리 자라기를 기다렸다. 나무 그늘에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날, 장인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땀으로 옷을 흥건히 적시며 쪽풀을 베었고 팔뚝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잎사귀를 으깨었다. 항아리에서 떠낸 쪽의 시간도 더했다. 무명천을 쪽물로 축이고 빨랫줄에 널고 다시 담그고 말리기를 반복했다. 쪽물들이기 작업은 뙤약볕이 힘을 잃을 때까지 이어졌다. 쪽빛은 기다림의 색이었다.

    쪽빛을 글 소재로 잡고 얼개를 짜며 주제를 찾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는 쪽항아리가 내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머릿속은 시도 때도 없이 쪽물이 출렁였고 손은 쪽물 든 천을 더듬느라 밤잠을 설쳤다. 장인의 입을 통한 단어를 주워 담고 체득한 언어를 내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은 파릇한 쪽풀이 곰삭아 남빛으로 우려지는 시간만큼 지난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설명하지마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말고 묘사하고 은유하라는 가르침은 도저히 넘지 못할 벽처럼 높았다. 깊은 색을 찾기 위해 항아리는 날것의 쪽풀을 공들여 품고 나는 삭히지 못한 언어들을 거두어 컴퓨터에 쌓아둔다. 봐줄 만한 글줄을 얻으려면 익히는 시간이 필수다.

    2021년 12월 끝 무렵, 퇴근을 서두르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경남신문입니다.’ 간절하게 기다리면서도 설마 하던 곳이었다. 얼떨결에 담당자의 묻는 말에 단답형 대답만 하고 끊었다. 믿기지도 실감하지도 못한 채 그동안 지도해 준 선생님께 담담하게 소식을 전했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도 모르게 눈물 한 줄이 볼을 타고 내렸다. 넘치는 기쁨과 더불어 ‘나도 이제는 글을 써도 되겠구나!’라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처럼 전문적인 글 수업을 받지 못해서인지 늘 마음 한편에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글 숲 언저리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는데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이정표는 한 발 더 내디딜 용기를 주었다.

    당선작 제목을 당당히 내걸고 첫 수필집을 내었다. 앞면은 쪽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 세 개가 어깨를 겯는 이미지다. 표제 글씨체는 쪽물이 튄 듯 동글동글 맺혔다. 뒷면에는 쪽물 장인이 항아리 곁에 서 있다. 장인이 맑은 쪽빛을 얻고자 긴 정성을 들이듯 글쓰기도 기다림의 연속이지 않느냐고 일러주는 듯하다. 티끌 같은 점으로 다가온 생각이 잡힐 듯 말 듯 뇌리를 떠돌다가 사유의 핏줄을 타고 점점 부피를 늘린다. 점들끼리 이어져 줄을 긋고 텅 빈 백지를 채우는 순간이 온다. 글쓰기도 어찌 보면 시간이 하는 일 같다. 내 삶이 뿌리 깊어야 독자에게도 공감 가는 글로 다가갈 터이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생생한 단어를 모은다. 다시 기다림에 매달린다.

    김희숙 (수필가·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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