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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느긋하게, 스스로 그러하게- 송미선(시인)

  • 기사입력 : 2018-03-30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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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나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벚꽃이 오후 서너 시쯤 지나자 무슨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꽃잎을 활짝 폈다. 긴 시간을 번데기로 지내다가 날개를 펴는 나비처럼 꽃잎은 열렸다.

    끝없이 늘어선 가로수나 호수 주변의 벚꽃도 아름답지만, 가로등이 켜진 뒤 만개한 벚나무 아래서 고개를 젖혀 올려다보면 하늘 가득 꽃잔치가 펼쳐진다. 가지와 가지 사이에 달이라도 들어오면 ‘달을 품은 벚꽃’이 연출된다. 나무 아래에서 한 걸음씩 움직여 보면 다른 가지 사이로 따라와 벚꽃에 안기는 달을 바라본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외국여행의 추억이 있다. 자유로운 배낭여행도 있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패키지여행을 택한다. 공항에서부터 시간과의 전쟁이라도 벌이는지 꽉 짜인 스케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호텔 조식부터 정해진 시간을 지키라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야 하며, 관광할 때도 몇 분 뒤까지 약속장소로 와야만 한다는 협박에 가까운 지시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여행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하는 무리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이렇게 팍팍한 일정에 쫓기다 보면 정작 봐야 할 것들을 많이 놓치고 만다.

    며칠 전 지인 세사람과 함께 서울 나들이를 나섰다. ‘박물관에서 고궁으로’라는 이름으로 나선 여행이다. 누군가 삶아온 계란으로 시작한 기차여행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해가 기웃할 때까지 박물관에 머물렀다. 많이 걸어 다리가 아프면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가 다시 다른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까지 정해진 숙소가 없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걱정하지 않았다. 버스와 도보로 일단 삼청동으로 갔다. 그리고 찾아낸 집에서 짐을 풀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다음 날을 맞았으며, 눈에 띄는 편의점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고궁으로 향했다. 사람들 눈길이 드문 고궁 빗물 배수구에서, 왕비가 머문 처소 뒤편 굴뚝 앞에서 멈췄던 발이 한참 동안 떨어지질 않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에 흰 눈이 내린 듯 백발이 되는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껍질이 하얗게 된다는 백송을 바라보며 잠시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하룻밤 묵었던 곳에서 하룻밤 더 묵었다. 한쪽에서 누군가 선잠을 즐겼고 나머지는 두서없이 이야기했다. 이틀 밤 동안 만리장성을 쌓으며 밤은 깊어갔다.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소리를 뒤로하고 잠 속으로 들었다. 그 다음날 정조의 도시 수원화성을 둘러보고, 누군가가 내놓은 곶감을 먹으며 기차는 집으로 내달렸다.

    매일 맞이하는 하루하루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작은 여행이다.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르며 내일도 오늘과 다를 일들을 맞닥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일들 사이사이에 잊고 지냈던 친구의 반가운 목소리를 듣는 우연한 즐거움도 있고, 겨우내 웅크리고 있다가 봄기운에 가려워 삐죽이 올라온 가로수 벚꽃나무 새순을 보며, 내일을 기다린다.

    미리 계획을 세울 수도 마무리를 지을 수도 없지만, 그러나 누구나 반드시 가야 하는 여행이 있다. 돌아올 기약 없이 나서는 여행, 아케론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카론을 마주보며 빙긋 웃을 수 있다면, 지친 어깨 위의 짐을 잠시 내려놓아도 괜찮을 것이다.

    느긋하게 그리고 스스로 그러하게.

    송미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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