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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꽃핀- 양지미(시인)

  • 기사입력 : 2017-07-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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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바람이 불었을까?

    사진 속에서 나풀거리는 단발머리. 그리고 꽃핀 하나.

    식구가 많았던 탓에 일일이 머리를 땋거나 묶어주는 것도 어머니에게 번거로웠을 일, 세수를 하고 빗질 몇 번으로 얼굴이 정돈되면 어머니는 머리에 꼭 핀 하나를 꽂아 주셨다. 대개는 꽃핀이 내 머리에 얹혔는데 그 핀을 한 번씩 바꿔 주는 것으로 어머니는 딸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셨다.

    내게는 그런 의미를 가진 핀이 하루아침에 조잡한 것이 되어 버린 사건, 이웃에 젊은 교사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은아라는 딸이 있었다. 여동생이 없던 나는 그 애가 무척 귀여웠다. 엄마 심부름으로 그집에 간 날, 은아가 내 핀에 관심을 보였다. 아쉬울 것 없어 보였던 그 아이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던 나는 얼른 핀을 빼 은아 머리에 꽂아줬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선생님이자 은아 아빠가 내게 던진 말, “너는 무슨 그런 조잡한 핀을 우리 애한테 꽂아주고 그러니?” 딸의 머리에 얹힌 핀을 잽싸게 빼버리며 그 선생님이 내뱉은 말과 눈빛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핀을 빼앗겨 우는 은아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받은 충격을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서서히 은아와 멀어졌다. 그리고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능력 있고 성실하다고 칭찬이 자자하던 그 선생님을 끝내 존경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나에게 꽂아준 꽃핀이라는 사랑을 이웃 동생에게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말과 눈빛으로 온전히 거절당한 사건. 아직도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나누는 일에 열 번도 더 망설이고, 부탁하는 일은 백 번도 더 생각한다. 친구는 나의 이런 성격이 사랑이 드나드는 통로를 좁힌다는 충고를 하고 나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 있어 태도를 바꿔 보려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다.

    어린아이는 추상적인 사랑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칭찬과 감탄으로 자라고 따뜻한 눈빛으로 조각된다고 한다. 귀에 붙은 어떤 말은 긴 시간 그 사람을 따라다닌다.

    어느 날 TV를 보다가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은발의 노배우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리며 화제의 인물이었던 그를 유심히 보자니 붉은 입술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입술이 사라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멋짐을 유지하려 애쓰는 그를 보면서 어쩌면 그 사람의 붉은 입술은 평생 내뱉은 말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간 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내 엉뚱한 상상처럼 말을 품은 입술 조각이 세상을 떠돌다 누군가의 귀를 자라게 한다면 상대방에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조잡한 핀’은 새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이다.

    비온 뒤, 바람이 산의 속살을 말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입술을 사라지게 하는 말과 귀를 자라게 하는 말이 지금도 무수히 허공을 떠다닌다.

    우리를 찾아오고 우리를 떠나가는 말이 모두 좋은 바람처럼 선선하기를 희망하며.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께 예쁜 꽃핀 하나 꽂아드린다.

    아이같이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

    양지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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