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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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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출구와 입구의 새 철학하기- 전문수(문학평론가)

  • 기사입력 : 2015-10-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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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삶은 지적 세계(知), 정적 세계(情), 의적 세계(意), 이 3대 정신세계가 다양하게 하위 분화돼 작동됨으로써 이뤄진다. 그리하여 참된 삶, 착한 삶, 아름다운 삶 등의 가치를 추구하고 누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위대한 지혜가 발휘되기 마련인데 소위 문화라는 이름의 거대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 문화범주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첫째가 시간과 공간의 복잡하고 다기한 분할과 가치의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들이 어떻게 설정되느냐는 시대와 삶을 추구하는 가치에 엄청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좀 현학적이지만 그 한 사례로 ‘출구’와 ‘입구’의 새 철학하기를 권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한 집안에서도 자기 거처의 독방에서 거실로 나올 때는 ‘나간다’라고 생각한다. 물론 집 밖의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것은 나감의 당연한 개념으로 여긴다. 인류 최초의 원시인들은 우주 공간 단 하나뿐이었다. 기껏 분할해 봐야 동물적 토굴 하나였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들 삶은 지적도의 실금 하나 사이로 모든 공간이 분화돼 내 것과 남의 것의 소유권이 칼날처럼 무섭게 번쩍이고 있다. 한 집안에서도 식구 수대로 공간이 분화돼 각자의 공간 가치의식은 점점 무섭게 세분돼 가고 있다.

    가령 아파트의 공간에서 가가호호 문밖으로 나오면 복도-승강기-주차장-경내도로 및 화단-아파트 관리사무소-버스 정류소 등으로 실금처럼 분할된 공간을 조심스럽게 의식하며 나만의 목표지점에 이른다. 만일 내가 움직인 동선을 따라서 공간도를 작성해 본다면 우리는 이렇게 나 아닌 타인들의 공간을 살얼음 걷듯 밟으며 살고 있는 너무나 각박함을 절감할 것이다.

    이 세상은 어디고 나갈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내 소유개념이나 남에 대한 배타적 감정만 없다면 다 내가 편하게 들어갈 곳뿐인 ‘들어감’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은 아무리 분할해서 소유하고 철조망을 쳐 보아도 잠시 내가 살다 갈 곳일 뿐이다. 나갈 곳은 죽어야 비로소 죽음의 곳이 있을 뿐이다. 내 방에서 거실로 들어가고, 다시 집문 열고 복도로 들어가고 승강기도 들어가고 도로로 걸어서 들어가고 정류소를 들어가고 등 ‘들어감’이 우리들 실제 삶이다.

    삶은 새로운 공간으로 끝없이 들어감이 있을 뿐이다. 시인이나 소설가 등 문인들은 끝없이 새로운 공간을 언어로 집을 지어 들어가는 삶이다. 이는 우리의 모든 삶과 문화가 다 들어감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태초에 인과관계의 유연한 연속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무 한 그루, 잡초 한 포기도 그것이 처한 공간은 모두 공유공간이다.

    인간의 개인주의, 자본소유주의 등 배금주의가 공유성을 망각한 것이다. 요즈음 부르짖는 창조경제 등 광적 창조 나팔 불기는 따지면 새 먹거리의 사물 인터넷처럼 존재의 모든 새 사물 철학하기의 바탕에서 우리들의 굳어 있는 공간 허물기, 시간 허물기가 시작돼야 한다. 미래는 생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없이는 얼마 가지 않아서 돈이나 권력, 부패 속에서 우리들은 질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한 번 잘못 길들여지면 무서운 감옥 속에 삶을 보낸다. 내가 있는 곳 외는 다 나갈 곳이라는 배타적 감정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어디고 내가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편히 들어 갈 곳이라는 긍정적이고 창조적 공간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이제 ‘출구’, ‘입구’의 새 철학하기를 시작하자.

    전문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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