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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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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시론] 자유롭게 다채롭게 - 이재수 (국민연금공단 창원지사장)

  • 기사입력 : 2023-11-19 21: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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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제나 그러하듯 자연의 흐름은 순리에 맞다. 입동이 지나자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바람은 매서워졌고, 찬란한 햇빛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이파리는 가뭇없이 떨어졌고, 공허한 바람만 앙상한 나뭇가지를 맴돈다. 어둠이 짙게 내린 거리엔 쓸쓸함이 가득하다. 지금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이다.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혼돈과 질서, 억압과 자유처럼 모든 경계는 이중적이다. 불안하고 혼란스럽지만, 설렘과 기대가 넘친다. 갈피를 잡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지만 금세 적응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생의 경계는 분명하다. 특히 법으로 정해놓은 정년의 틀은 장년과 노년을 확연하게 구분한다. 은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열정과 패기로 화려한 꽃을 피워냈지만, 나이가 들수록 위축과 실패를 경험하며 볼품없는 가장자리로 비켜난다. 결코 되돌릴 수 없으니 시간은 늘 비가역적이고 그래서 야속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세계로의 진입, 어찌 두렵고 망설여지지 않겠는가.

    탄생과 동시에 ‘불굴의 패배’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게 인생이다. 나이 듦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늙을수록 신체의 반응 속도, 근육의 탄력, 지각하는 능력은 하향할 뿐이다.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는 길어졌고, 앞에 남겨진 시간은 갈수록 줄어든다. 얼마 남았는지조차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지난 삶을 바라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무언가를 절대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 필요한 걸 찾은 경우에 그건 우연 아닌 필연”이라고 말했지만, 삶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우연히 선택한 직업의 세계에서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대체적으로 평온한 채 적잖은 영광을 거둔 건 기적이다. 다만 타성에 젖어 본연의 개성을 망각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폭넓게 사고하지 않으니 기존 관행에 길들여져 돌변하는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훈련된 무능력’에 갇혀 관점은 고착됐다. 표준적인 행동양식에 ‘과잉동조’하여 진정한 목적은 도외시한 채 수단에만 집중했다. ‘집단사고’에 함몰되어 충분한 분석과 토론 없이 합의하고는 최선이라 믿으며 합리화하기 바빴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므로 조직 뒤에 숨어 무모한 위험을 수수방관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시위를 떠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지난 시간을 아쉬워해 본들 아무 소용없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바야흐로 호모 헌드레드 시대! 은퇴 후에도 자그마치 삼십 년을 더 살아내야 한다.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으니 새롭게 맞이하는 나날들은 충실하게 살고 싶다. 감사한 마음과 호기심 그득한 시선으로 자유롭고 다채롭게.

    삶은 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삶은 위험을 동반한 험난한 여정이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을 가지는 것”이라면, 은퇴 이후의 삶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무대에서 낯선 시각으로 색다르게 살아보면 어떨까. 인생이라는 ‘실험’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관계없이 그 과정에서 뭐든지 배울 수 있다.

    과거와의 단절은 새로운 시작이다. 낯섦과 불편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은 더 활기 있을 것이다. 다양성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텅 빈 여백을 다채롭게 물들이는 일상은 더 창조적일 것이다. 무성한 이파리를 모두 털어내고 오직 뿌리와 줄기에 집중하는 겨울나무처럼 은퇴 이후의 삶은 오롯이 내면에 집중하는 고독한 여행이어야 한다. 그리하면 노년기 나름대로 ‘아름다운 시절’을 맞이할 수 있고,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라고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생은 우연이고, 간절하게 원하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니까.

    이재수 (국민연금공단 창원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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