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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3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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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그 집 앞- 이재성 시인(201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기사입력 : 2023-08-04 0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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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 전, 지금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텐트를 치기 전에 땅을 골라야 된단다, 낙엽을 깔고…….” 우리 가족의 여름 휴가지는 항상 함양 외할머니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이 바로 캠핑하는 날이었다. 캠핑이라는 단어가 생소할 때다. 지리산 용추계곡, 농월정 일원으로 온 가족이 모이는 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외사촌들 모두 손잡고 피서를 가던 풍경이 선하다. 온 가족이 일정을 맞춰 고향으로 모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장마가 지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던 그쯤이다. 바로 오늘처럼 그날도 그랬다.

    고사리손에도 쥐여졌던 작은 텐트가 무겁다. 낑낑대며 올랐던 산길 넘어 물소리가 들려온다. 구멍 난 튜브에 바람 새는 것도 모르고 얼굴 새빨개지게 불었던 기억이 돋는다. 기억을 더듬으면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에 수박 한 덩이 떠다니고 다이빙 바위 위에 당당히 서 있는 외삼촌들이 떠오른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풍덩, 풍덩 빠졌다. 온몸이 불어 터질 때까지,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제 키보다 깊은 물에서 허우적대다 물 먹고 깊은 물은 현의 색을 가졌다는 것을 배웠다.

    새까맣게 타버린 피부가 따가울 때면 오이나 수박껍질을 붙였던 유년의 기억. 뜨거운 여름을 가린 숲속에서의 일주일이 떠오른다. 데워진 돌에 귀를 가져다 대면 빠져나오던 나른한 물과 물놀이를 하다 지치면 허기를 채울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몰랐던 그 시절의 나, 그리고 오늘 얼음골 산장에서 손을 마주 잡은 아들의 눈동자에 그날이 보인다.

    길도 좋고 많이 편해졌다.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육십령로에 화림동 계곡물이 흐르는 곳. 세월을 지난 간판에는 수영장, 민박, 매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계곡물에 놓인 평상과 오래된 파라솔이 펼쳐진다.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그곳. 외할머니가 어린 어머니와 함께 더위를 피하던 그곳. 주인장이 삶은 백숙 한 마리와 평상에 앉는다. 얼음처럼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면 그날의 젊은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변한 것은 기후변화와 흰 머리칼뿐일까. 평상에 다 같이 앉으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엄마를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린 아들, 딸은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그날이 선한 만큼 변한 것은 세월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우리 엄마가 됐다. 우리 엄마가 이제 할머니가 됐다. 며느리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풍경이 되감긴다.

    짧은 행복을 뒤로하고 다시 찾은 외할머니댁이 보인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 일 년에 한 번 찾을까 말까한 그 집 앞에서 웃음소리 들린다. 어서 오라 손짓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인다. 이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 있고 마지막까지 빨간 대야에 물놀이하던 그날의 나와 오늘의 내가 마주친다. 시원한 바람,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즐겼던 행복한 순간이 이렇게 전승된다.

    이재성 시인(201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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