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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25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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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나의 마지막 풍경- 이경주 시인(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기사입력 : 2023-06-01 19:2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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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 전 친한 후배의 모친상을 다녀왔는데, 평소에 보아 온 빈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다소 인상적인 풍경을 마주했다. 조화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조화 대신 긴 테이블이 줄지어 있고, 그 위에 돌아가신 후배 어머니의 사진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고향 초가집 앞에서 찍은 듯한 아주 오래되고 바랜 흑백사진에서부터, 병실에서 찍은 최근의 사진까지. 어머니의 팔십 인생의 주요 순간과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사진들이었다. 조문객들이 어머니께서 이제까지 살아오신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잠시라도 그녀의 인생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 집안을 뒤져 사진을 찾았다고 한다.

    빈소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조문객들도 부산하게 드나들지 않았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기도 하고, 눈가에 반짝 이슬도 맺혀 가면서, 그녀의 팔십 년을 차근차근 돌아보고 있었다. 나 또한 하나하나의 사진에 얽힌 사연들을 들으면서 한 사람의 생에 대해, 이 세상에 남긴 추억과 흔적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여러 장례식장을 다니다 보면 빈소의 모습을 통해 고인의 전 생애를 뚜렷하게 떠올리게 되는 경험을 가끔씩 하게 된다.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한 분의 영정 앞에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이 놓여 있고, 학술 연구에 평생을 바친 분의 자리에는 그가 저술한 책들이 진열돼 있기도 하다. 한 사람의 뜨겁고 지난했던 생의 기록이요, 그가 두고 간 선물인 셈이다.

    출세를 하지는 못했어도, 큰 부를 일구어 내지는 못했어도, 그저 필부필부로 살았어도,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자국은 똑같은 무게와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들이 아닌가.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기고, 어떠한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삼십 년 넘게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중심이라는 곳에서 일했지만, 어디 내세울만큼 대단한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고, 그곳에 나의 손길이 오래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까지 무심하고 이기적인 태도로 이웃을 대해 왔으니, 그들로부터 진한 눈물 한 방울 받아 낼 자신도 없다.

    신춘문예라는 말이 무색(?)하게 육십이 되어서 시의 세계에 부끄러운 얼굴을 내밀었으니, 이리된 이상 내가 오래 꿈꾸고 그리던 이 세계에 푹 빠져 살다 가고 싶다. 등단 후 이삼십년 이상 부지런히 활동해야 중견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 시를 얼마나 쓸 수 있을지, 시집을 얼마나 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냥 쓰고 싶을 따름이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나의 시 한 편이 따뜻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면, 나의 시 한 구절을 떠 올려 주는 단 한 사람의 조문객이라도 맞이할 수 있다면 나의 마지막 날은 아름다울 것이다. 지나친 욕심이라는 핀잔을 듣더라도, 나는 꼭, 그 풍경을 마주하고 싶다.

    이경주 시인(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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