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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30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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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삶이라는 기적- 장석주(시인)

  • 기사입력 : 2022-09-29 19: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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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기분이 나아진 것은 순전히 쾌청한 가을 날씨 덕분이다. 보온성이 좋은 수면 양말을 신고 무명 이불을 덮고 잠드는 게 좋다. 새벽에 눈 뜨면 침대 한쪽에서 고양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게 보인다. 고양이 등을 쓰다듬으면 고양이는 잠결에도 기분이 좋아 골골거린다. 가을은 먼 곳에의 그리움이 속절없이 깊어진다. 상강 무렵 맑고 건조한 햇빛 아래 구절초 꽃은 피어 흔들린다. 먼 길 떠나는 자와 먼 길에서 돌아오는 자의 걸음이 우연인 듯 엇갈리는 계절이다.

    소규모 살림이 나아질 기미는 희박하지만 견디며 살 만하다. 가끔 책을 덮은 뒤 강가에 나가 모래와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온다. 자주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다. 날씨의 독재 아래서 구두는 낡고 양말엔 구멍이 난다. 낡는 게 죄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내 안에는 감정과 욕망이 소용돌이친다. 삶을 생산하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극단으로 흐를 때 해악이 되는 이것은 나를 빚는 중요 성분 중 일부다. 나는 이것들에 휘둘리며 고투하는 존재이다.

    문득 전혜린을 떠올린다. 난방용 연료로 연탄을 태울 때 생긴 일산화탄소가 농밀하게 떠도는 서울의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독일 뮌헨의 가스등과 안개를 그리워하던 독문학도 전혜린은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고 썼다. 먼 곳을 그리워함! 인간이 저 너머를 꿈꾸는 것은 발 딛고 사는 지금의 현실이 낙원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을 낳는 자리라는 부정적 인식에서 시작한다. 1960년대의 젊은 지식인 전혜린은 제 조국의 가난한 현실과 척박한 지적 토양에 진절머리를 치며 저 서구의 나라를 꿈꾸었을 테다.

    먼 곳을 그리워함은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본성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이다. 모르는 곳에서 삶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이 가없는 꿈일지라도 그 달콤함에서 깨고 싶지는 않았을 테다. 이 마음의 바탕은 살아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동경, 먼 곳을 향한 노스탤지어,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이 마음을 철부지의 호사 취미이자 향수 취향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독문학 책들을 번역하다가 돌연 이승의 삶과 작별한다. 그것은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어서 사회에 꽤 큰 파장을 남겼다.

    생활에 너무 근접해서 사는 자에게 삶의 비루는 더 잘 보인다. 삶의 근경에 붙박여 살 때 우리 뇌는 더 비관으로 기운다. 별들을 바라보며 걷는 자는 필경 진창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지만 우리는 마음의 근심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먼 것을 꿈꾸고 바라본다. 먼 곳을 동경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사람보다 더 이상주의자일 것이다. 이상주의자란 짐승들이 으르렁대는 동물원에서 천국 보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사람은 반드시 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어야 한다’고 노래한다. 현실 저 너머의 환상을 빚는 뇌는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우리는 이 궁극의 것을 쥐고 저 먼 곳에 도달하려고 노력한다. 게으른 사람도 근면한 사람도 다들 행복을 꿈꾼다. 하지만 대개는 행복이 무엇인지 딱히 모르고 산다. 나날의 삶이 기적이라는 대 긍정에서 빚어지는 낙관적인 감정이 행복이 아닐까? 먹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나날들 속에서 아이들은 저절로 자라나고, 강물은 바다를 향해 흐르고, 계절은 영원히 순환한다. 이게 기적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볕 좋은 가을날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다. 근처에는 비둘기 몇 마리가 구구 거리며 모이를 찾는다. 녹색 짐승 같던 활엽수는 가을로 들어서며 단풍이 든다. 나날은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어느 하루도 똑같지는 않다. 우리는 날마다 다른 하루를 맞고, 날씨의 변화무쌍함과 계절의 순환을 받아들이며 산다. 삶은 기적이다! 이 기적에 기대어 우리는 덧없음과 허무를 넘어서고,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는다. 가을엔 누구에게라도 지난해보다, 아니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고백하고 싶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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