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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나의 해방일지- 이상희 소설가(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 기사입력 : 2024-03-14 19: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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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겨울, 초등학생인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넷플릭스에 가입했다. 친구들 사이에 인기 있는 드라마를 정주행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웹툰 원작인 로맨스 드라마부터 공포영화까지 섭렵하며 나름 알찬 겨울 방학을 보내던 딸이, 내게 드라마 한 편을 추천했다. 손석구 배우가 나오는 ‘나의 해방일지’였다.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TV 앞에 앉는 것이 귀찮아 드라마를 보지 않던 나였다. 그러나 소파에 누워 손가락만 까딱하면 언제든 원하는 콘텐츠를 볼 수 있는 OTT의 매력에 감탄하며, ‘나의 해방일지’에 빠져들었다.

    주인공 염미정은 직장에서 동아리 가입을 강요받는다. 집이 멀다는 이유로 -사실은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가입을 거절하지만 계속되는 압박을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사내 행복지원센터에 번번이 불려가던 염미정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직원에게 직접 동아리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름하여 해방클럽.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시작된 해방 클럽에는 세 가지 강령이 정해진다.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나 자신을) 정직하게 보겠다.’ 모임을 거듭하는 그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애써 웃거나 대화의 공백을 메우려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을 응시하는 일에 집중하며 한마디 한마디 마음속 이야기를 꺼낸다.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 상처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마네킹처럼 웃고 있는 자신의 표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지금껏 나를 위해 별로 살아본 적이 없는 모두의 이야기 같아 코끝이 찡해졌다. 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해방이 있기나 한 걸까.

    드라마 이야기를 한창 듣던 지인이 내게 대뜸 이렇게 물어왔다.

    “작가님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요?” “…… 밥이요.”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다. (밥이라니, 너무 시시하잖아!) 농담이라며 피식 웃었지만, 씁쓸한 기분은 숨길 수 없었다. 유난히 집 밥을 고집하는 남편, 먹을 게 하나 없다며 물김치만 떠먹는 시어머니,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하다 끝나 버리는 명절과 제사. 그들을 향했던 나의 노력이 ‘당연함’이라는 딱지가 되어 내 등에 붙여졌을 때, 나는 해방을 선언했었다. 해방의 이름은 ‘며느리 사표’였다.

    내 사표는 정당하다고 계속해서 외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썼다.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도록 여러 책을 탐독했다. 그 후 나는, 나의 쓸모를 끊임없이 증명해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인공 염미정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 집중했다. 힙한 주부라고 나 자신을 치켜세우면서.

    나의 해방일지가 소설로서 더욱 빛을 발하기를 염원하며, 나는 나를 끝까지 응원할 것이다. (*)

    이상희 소설가(202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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