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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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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가늠할 수 없는 것- 곽민주 소설가(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소설 당선)

  • 기사입력 : 2024-01-18 19: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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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름 동안 제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목표는 하나였다. 한라산 오르기. 튼튼한 두 다리와 시간, 그리고 인내심만 있다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한라산에 오르는 일엔 여러 가지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 그중에 하나가 날씨다. 여행을 하는 내내 내가 경험한 제주의 날씨는 마치 사람의 마음처럼 변화무쌍하다고 생각했다.

    입장 예약을 했던 둘째 날부터 입산 통제가 있었다. 다음 날에는 갈 수 있겠지. 그다음 날에는 갈 수 있겠지 싶었지만 뜻하지 않게 장마가 계속되었다. 어스름한 새벽, 일정을 변경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날씨가 좋아졌다. 그래서 분했다. 내게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끝내 육지로 돌아가야 했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그날도 비가 무지막지하게 왔다. 내게 허용된 범위는 진달래 대피소까지. 정상에 오를 순 없었으나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내 목표는 한라산에 오르는 것이었으니 산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입구는 텅 비어 있었고 직원은 내게 여름 뱀이 사납다고,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전날 구입한 얇은 우비 하나를 걸친 채 묵묵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밑창이 까진 운동화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어둑하게 쌓인 구름 아래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온몸을 때렸다. 발을 디딜 때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패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틀 전 자전거를 타다 크게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을 비롯한 다리는 온통 피멍이 들어 있던 데다 조금 절뚝이기까지 했다. 가는 동안 길을 잃는 것이 불안했고,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다칠까 무서웠으며, 등반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산속에서 산짐승을 만날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더 싫었던 것은, 내가 그곳을 끝내 먼저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열일곱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십 년쯤 지났을 땐 서른이 되어도 작가가 되지 못한다면 글 쓰는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사랑도 몹시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른이 되었을 때 내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글쓰기를 어렵지 않게 떠나보낼 수 있었다.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기에 비로소 포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가치를 포기하고 나니 세상 모든 것에 시샘이 났다. 무엇이든 해내고 싶었고, 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커졌다. 누군가에게는 열정으로 보였겠지만 내게는 좌절감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리라.

    사라오름에 도착했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등산을 하면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게 된다. 내가 서 있는 곳과 저 멀리 가야 할 정상의 풍경을 가늠해 보게 된다. 조금만 더 가면 되겠지. 몇 걸음만 더 힘을 내보자. 그러나 그날 내가 목도한 풍경은 흐린 안개였다. 눈앞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 백록담의 실루엣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도저히 얼마만큼을 더 가야 하는지, 애초에 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높다란 곳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나는 그 풍경이 좋았다. 가늠할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얼마나 왔는지, 앞으로 내 인생에 있어 얼마만큼의 장애물이 놓여 있을지, 도착할 수는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계속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더니 거짓말처럼 만 나이가 시행됐다. 나는 다시 스물여덟이 되었다. 바뀔 리 없던 운명이 바뀌어버렸는데 소설을 더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문학 하는 마음, 우리네 인생을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고, 단단한 땅을 찾아 바닥을 딛고, 때로는 사나운 벌레나 나뭇가지에 살을 베이기도 하며 저 멀리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수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 도달할 시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어서, 알면 알수록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사는 게 즐거운 거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이제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너그럽게 헤아려 보려 한다. 이것이 소설보다 더 재밌는 나의 이야기다.

    곽민주 소설가(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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