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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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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에세이] 판타지 별곡- 이명숙 동화작가(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동화 당선)

  • 기사입력 : 2024-01-11 19: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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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리베이터를 타겠다고 한 줄로 서서 기다리는 청둥오리들이 있다면 믿겠는가. 상상 속 친구냐고? 천만의 말씀. 실제 살아 꿈틀거리며 학교 텃밭을 종횡무진하는 우리 학교의 귀여운 난봉꾼들이다.

    청둥오리 산책 당번이었던 그 아이는 마지못해 끌려 나왔는지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발끝으로 흙장난만 치더니 바가지에 담긴 토마토를 툭 내려놓으며 먼 산만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도 표정도 없는 그 아이의 무채색 분위기는 교실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

    다섯 마리 아기 청둥오리들은 그 아이를 따라 줄지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육교를 건너 천변을 따라 내려갔다. 어미 새 없이 인공부화기로 세상에 나온 이 녀석들은 기특하게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았고 뒤뚱뒤뚱 나동그라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릴 줄도 알았다. 도심 속 1급수 하천이 어디 흔하랴. 청둥오리들은 정신없이 물속으로 달려 들어가 날개를 적시며 물놀이 삼매경에 빠졌다. 그런데 그 아이가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구와 이야기하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곽곽거리며 첨벙대는 시끄러운 청둥오리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자석에 딸려 가는 철가루처럼 그 아이를 따라 일렬로 줄을 서서 왔다 갔다 하는 장난꾸러기들은 꼭 한 가족 같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선언했다. 남은 방학 기간 매일 청둥오리들의 산책을 책임지겠다고. 그 아이는 가족이 없어 보육원에서 살고 있는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청둥오리들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자신이 꿈꾸던 판타지를 만난 게 아닐까. 판타지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작은 파동 같은 판타지 덕분에 그 아이가 목젖을 보이며 웃었고, 마음을 나눌 존재가 생겼다. 어떤 판타지를 만났건 현실 속에서 단단해질 수 있는 여유가 생겼구나 싶었다. 마치 내가 오래전 만났던 판타지처럼.

    열세 살의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던 외롭고 어두운 병실에서 나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양쪽 날개를 활짝 편 종이학을 처음 만났다. 건너편 침대의 환자였던 그는 내가 통증으로 칭얼거릴 때마다 색동저고리 색깔의 종이학들을 손바닥 위에 사뿐히 올려주었다. 그 종이학들은 나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내가 그 병실을 온전히 나갈 수 있을 때까지.

    동화는 꿈을 그려낸다. 때로는 현실적인 희망을, 때로는 비현실적인 환상을. 이 꿈을 통해 우리의 삶과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 동화는 어린이들의 상상 속 친구이며 판타지이다. 현실을 비틀고, 뒤집고, 재창조하지만 이 판타지들은 현실에 짓눌리지 않고 그것을 마침내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판타지는 인생의 굴곡을 버티어 낼 내면의 힘을 길러주었다고 믿는다. 판타지는 현실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 속 친구와 이별한 어른들에게, 또 아직 상상 속 친구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조용히 속삭여주고 싶다. 우리 옆에는 판타지를 노래하는 동화가 있다고.

    이명숙 동화작가(202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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