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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간격- 김시탁(시인)

  • 기사입력 : 2023-11-29 19: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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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끝물 고추대궁을 뽑으며 생각해보니 고추 고랑을 넓게 해서 수확이 더 늘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곡식도 드문드문 심어야 바람길 열리고 햇살 들어 병해가 적고 수확이 는다는 것을 필자도 귀농 5년 차 농부가 되어서야 알겠다. 사람의 관계도 그러해서 가깝고 친한 사이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사는 간격이 필요하다.

    간격은 위험으로부터 떨어지는 인위적 거리두기와는 달리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그리움이 고여 출렁거리는 다리다. 너무 가까이 함께 있는 사람일수록 서로 존중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편하다는 이유로 쉽게 말을 하고 가볍게 행동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한 감정은 그때 어루만져 풀어주지 않으면 경직된다. 감정이 굳게 되면 서먹하고 소원해지며 관계가 악화된다. 그러니 부모 형제는 물론 소중한 사람일수록 적당히 간격을 두고 서로를 바라보고 위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로가 자주 오가지 못해 그리움 쪽으로 난 길에 잡초가 우거져서 길을 잃는다. 그 길로는 안부를 물어보기 위해 마음을 마중 보내더라도 거미줄이나 가시덩굴에 걸려 가닿지 않기 십상이다.

    육신이 멀리 떨어지면 영혼도 따라간다. 적당히 떨어져 사는 간격을 여유라고 해도 좋다. 그리움이 고여 출렁대는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은 만남의 전제하에 희망을 유보하는 아름다운 인내다. 그 인내를 딛고 만나게 되는 관계야말로 신뢰의 강이 더욱 깊어서 첨벙 빠져 허우적거려도 좋을 인연이라 하겠다. 적당히 간격을 두고 심은 고추가 병해 없이 잘 자라서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주고 수확을 끝낸 끝물 고추대궁조차 비록 야위었지만 서로 엉겨 훼손되지 않고 고운 상태를 유지하니 수거하기나 보기에도 좋은 것이다.

    우리 사회도 간격을 유지하면 건강해진다. 모든 문제는 엉겨 붙은 밀착에서 발생한다.

    다시 농부 얘기를 해보자. 양파나 감자나 과일을 수확해서 박스에 넣은 채 보관해 보면 제일 먼저 서로 맞닿은 것들부터 썩기 시작한다. 서로 몸이 닿지 않도록 신문지나 볏짚을 끼워 이격을 주면 상하지 않고 오랜 기간 보관해도 상태가 양호하다. 엉겨 붙은 데서 병균이 발생하고 부딪친 곳에서 상처가 난다. 붙거나 끼여 있는 밀폐된 장소에는 바람과 햇살이 드나들지 못하니 곰팡이가 피고 상하는 것이다. 간격을 벌려주거나 공간을 만들어 통풍을 시켜주면 싱싱하게 유지된다.

    어울려 함께 사는 집, 같이 쓰는 물건, 같은 직장 모든 것들이 유지해야 할 간격이 있다. 한 몸처럼 생각한 관계가 뒤틀려서 배신당했다고 괴로워할 필요 없다. 본래 한 몸이 아니었는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뒤늦게 깨닫게 되는 착각일 뿐이다. 서로 마음이 맞아 공유한 물건이 끝까지 찰떡같은 한 사람 마음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가라는 법 없다. 노사 간에도 간격이 필요하다. 노동의 가치만큼 적당한 대가를 지불받는 계약 관계는 긍정적 간격을 담보할 때 건강하게 유지된다.

    정치와 경제도 간격을 무시해서 많은 병폐를 불러왔는데, 그것은 대부분 음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투명성이 없어 부정과 부패를 낳은 것이다. 관료는 관료의 위치에, 경제인은 경제인의 위치에, 정치인은 정치인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서로 너무 가까이하는 당신이 되다 보면 빛조차 들어갈 공간이 없어 변색 된다. 적당한 간격을 둔 상태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밝은 등을 달면 어떠한 관계도 밝고 투명해진다. 지금 너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적당히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보자. 한패니, 한통속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은 적당한 간격 없이 엉겨 붙어 냄새를 피우는 집단을 싸잡아 부르는 호칭이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살아보면 이게 비로소 제대로 사는 삶이란 걸 알 수 있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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