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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6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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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현대사회의 추상성과 기억의 약화- 김경복(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기사입력 : 2023-11-15 19: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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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이 자주 끊긴다. 애를 쓰면 겨우 떠오르곤 한다. 최근 일들 중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다. 부분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져 이러면 곤란한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건망증인가, 술을 좋아해서 발생하는 알코올성 치매인가. 병원에까지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마음 한편 불안감이 솟아나는 것은 감출 길 없다.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60에 겨우 이른 나이로 치매 전조 증상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라 할 수 있고, 알코올 중독을 말하기엔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기억이 끊기고 사라지고 있는 점을 내 안의 문제로만 단정 짓고 말기엔 너무 이상한 결론 같아 보인다. 다른 무언가가 나의 기억을 앗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소설 ‘모모’의 회색인들이 사람들의 시간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내 안의 기억을 누가 먹어치우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수 없게끔 하는 어떠한 현상이 주위에 있다고 말해야 하리라.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에게 기억은 참으로 소중하다. 기억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자기 존재감에 대한 실존성을 부여하게 되니 말이다. 기억이 없다면 정상적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기억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좀비’, 즉 살아있는 시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기억이 사라지거나 풍성하지 않다는 것은 현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지도 의미 있지도 않다는 것을 뜻한다.

    기억의 절대적 의미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화는 미래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음직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래 인간들은 자신을 대신할 복제인간을 만들지만 이 복제인간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특수경찰대인 블레이드 러너를 시켜 복제인간들을 처단하게 한다. 주인공인 블레이드 러너가 복제인간을 찾아 사살하려 할 때 도망치는 복제인간들이 주인공 앞에서 죽기 전에 울부짖는 대사,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에게도 추억이 있으니…”. 아직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말로 인간이라는 본질적 속성이 ‘기억’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해도 되지 않을까? 기억이 인간이다. 기억이 실존이다. 기억이 그 사람의 정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기억은 썩 그리 선명하지도 개성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문제다. 시골로 대변되는 유년의 기억은 각자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면, 도시로 불리는 문명화된 삶 속에서의 기억은 흐릿하거나 비슷비슷하여 기억의 정체성마저 의심받게 한다. 그것은 근대적 사회 이후 인간 삶을 둘러싼 환경이 추상화된 시공간이라는 점에서 발생한다. 즉 가공할 빠르기로 움직이는 속도로 말미암아 시간이 압축되어 시간 속에서 뚜렷하게 인식되어야 할 기억이 스치듯 상만 맺고 말기 때문에 불투명해지는 속성을 띤다. 빠른 속도성 앞에서 기억이란 마치 컴퓨터에 무수한 정보를 입력해 두는 것처럼 집어넣기만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아 의미를 가려내는 기억의 성징(性徵)을 갖추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거기다 효율화로 재단된 공간적 표상은 획일화되어 있기 쉬워 공간의 변별을 통한 기억의 정체성을 확보해주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상을 제시함으로써 기억의 약화를 불러온다.

    기억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들 삶이라는 점에서 나의 고민은 비단 나만의 고민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한계에서 오는 치명적 진실이 우리들 삶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이 우울함도 털어버릴 수 없다. 좀비, 아님 사이보그화되어 가는 현대적 일상 앞에서 그래도 인간으로서 끝내 놓쳐서는 안 될 기억은 무엇인가?

    김경복(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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