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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6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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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칼럼] 우리가 기다리던 가을- 이재달(심산서울병원 부이사장·전 MBC경남 국장)

  • 기사입력 : 2023-10-18 19: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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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청명하고 선선한 바람결은 절로 콧노래를 불러온다. 한낮에 내리쬐는 볕은 아직 따스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들녘의 황금물결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알알이 익어가는 과실마다 넉넉함이 듬뿍 넘친다.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에는 한시도 눈을 떼기 어렵다. 이런 가을을 아무리 예찬한들 지나치기는커녕 표현의 부족함만 느낄 따름이다. 이래저래 충만한 기쁨과 까닭 모를 환희로 또 가을을 맞는다.

    가을이 이런 것인 줄 몰랐던 건 아니다. 가을을 맞이한 회수만도 부끄럽지만 적지 않아서다. 그런데 해마다 오는 가을을 그저 찬미하고, 눈앞의 아름다움에만 빠져들었다. 마음속의 낭만에만 젖어 들었던 가을이었다. 그렇게 가을을 맞고 보내며 청춘의 시간도 바야흐로 흘러갔다.

    언제부터인가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고, 가을이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느낀 것도 이 무렵이다. 가을을 만들어 내기까지 겪어야 하는 인고의 시간, 그리고 그 아픔을 생각하게 되었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은 그렇게 필자에게 꽂혔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이하 생략)

    우리나라는 지금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가을을 보내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세계를 휩쓸고 있는 소프트파워, 또한 유럽의 무기 시스템을 바꾼 하드파워…. 참으로 놀랍고 대단한 일을 우리가 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런 일을 우리가 하리라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60년대 국민소득이 아프리카의 가봉에도 미치지 못하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필리핀을 마냥 부러워하던 그런 나라였다. 더욱이 우리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사람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국토는 좁은데 천연자원도 없었고, 그마저 비옥하지 않았다. 더더욱 북한과 살벌하게 대치하는 준전시 국가였다. 풍요라고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조그만 반도 남단의 보잘것없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런 나라에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단단한 대추 한 알이 맺었다. 수확의 밑거름을 뿌린 이들은 이 나라 구성원 모두였다. 머나먼 독일의 탄광에서, 혹은 응급 병동에서 눈물 훔치면서 번 돈을 고국으로 보냈다. 열사의 땅 중동에서도 구슬땀 흘리며 오일머니를 벌어서 한 가정을 건사했다. 희생적인 형, 누나들 덕분에 학업을 이어간 이들이 지인 중에도 많다. 그렇게 공부한 이들 또한 개발 시대에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벽돌 한 장을 얹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진국 제조업체를 시찰하며 사소한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배워와 산업화의 기틀을 다진 엔지니어들, 부귀영화를 버리고 빈곤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귀국한 과학 인재들, 이들의 힘과 동력을 결집한 정·재계 리더들. 이들은 세계사적으로 위대한 평가를 받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이 땅 위에 펼쳤다. 그 결과 우리는 단단하고 맛있는 대추를 수확하며 가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가을의 풍요를 마냥 누리기에는 작금의 상황이 너무 걱정스럽다.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탐욕을 부리고, 더 높은 자리를 가기 위해 타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다. 가짜와 조작을 통해 진실을 억누른다. 이처럼 비상식적인 일이 버젓하게 자행되는 세상에서 위태하게 가을을 보내고 있다. 비상식을 상식이라고 주장하는 확증편향과 아둔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정의 가치를 세 치 혀가 아닌 현실에서 바로 세워야 한다. 내면의 욕심을 내려놓고, 과학과 진실 앞에 다가가야 한다. 공동체란 의외로 취약한 구석이 많아 구성원의 덧없는 욕심으로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 풍요로운 가을을 후대도 마땅히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책무이기도 하다.

    이재달(심산서울병원 부이사장·전 MBC경남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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