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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0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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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결핍증(缺乏症)-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 기사입력 : 2023-09-25 19: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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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여름은 혹독했다. 어느 해 여름보다 폭염과 폭우, 태풍의 피해가 컸다. 긴 열대야에 정신마저 쇠약해지는 날들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얼추 견딜만했다고 추억한다. 사람의 감정이 이처럼 얄팍하다.

    결핍이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빠지거나, 모자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와의 분리에서 오는 근원적 결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프랑스 현대 철학자 ‘라캉’의 개념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이제 막 가로등이 켜지는 저녁 강둑을 걸어본다. 차랑차랑 탯줄 자르는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강물에 손을 담근다. 아직 뜨뜻미지근하다. 낮 동안의 햇볕이 미련처럼 남아있는 이 온도가 낯설지 않다. 사람이 느끼는 가장 평온한 온도! 아마 태아였을 때, 느꼈던 온도이리라. 우리는 모두 마침내 세상으로 나오며, 처음 겪는 온도에 놀라서 본능적으로 첫울음을 우렁차게 내질렀을 것이다. 탯줄이 잘리며 완전히 독립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비로소 근원적인 결핍이 시작된다.

    저녁 강물에 오래 손을 담그고 나니 한결 살맛이 난다. 아무도 기다리는 사람 없는 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단했던 하루의 그림자가 천천히 따라오며 뭐라 뭐라 중얼거리지만, 오늘은 애써 모른 척하기로 한다.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옷가슴을 여민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는 정호승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살면서 이러저러한 육체적인 결핍이야 후천적인 노력으로 충분히 보완될 수 있다. 문제는 정신적인 차원이다. 태어났으므로 이미 온당한 그 결핍을 어떻게 자신이 잘 다독거려 더불어 안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그 외로운 영혼들을 위하여 본격 예술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물론 종교적인 탄생의 근거도 되겠지만, 이 지면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누구나 불완전한 결핍 상태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뜨뜻미지근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먼저 울어야 한다. 내 눈물로 내 눈을 씻어야 비로소 타인의 눈물이 보인다. 내가 먼저 땡볕을 막는 그늘을 만들어야 타인이 쉴 수 있다.

    그러니까 내 결핍을 먼저 들여다보고, 스스로 위로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은 없던 것이 새로 나타나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결핍은 곧 나를 되돌아보는 근원적인 힘을 숨기고 있기도 하다. 그 힘을 기르면 더욱 깊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한번 생각해 보라. 나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보라. 나는 무엇이, 어떤 점이, 어떻게 부족한지를. 그 결핍을 곰곰이 만나보아라. 끝끝내 내가 안고 가야 할 나의 심장 같은 것이니까.

    곧, 가장 가까운 결핍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추석이다. 근 일주일의 연휴다. 혹독한 지난여름을 견딘 보상일까? 우리 고유의 명절인 만큼 적어도 어디든 살아 있다면, 그 결핍의 유전자를 나누며 뜨뜻미지근하게 만나야 하리라!

    세상이 참 바쁘게 돌아간다. 나의 결핍이 어쩌고저쩌고 할 사이도 없이, 거대한 자본주의에 휩쓸려 무엇을 되돌아볼 틈도 없다. 마치 결핍은 물질로 다 채울 수 있다는 논리가 팽배하다. 참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 밤도 지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누런 기름 냄새 풍기며 옛날통닭 한 마리 사 들고, 으쌰으쌰 귀가하는 당신들이 있으리라.

    결핍의 계절, 가을의 길목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환하게 손뼉 치며 줄지어 마중 나와 있으리라. 눈을 제대로 뜨고 보면, 바로 내 앞에 말이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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