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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낮은 삶을 걸어온 당신-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 기사입력 : 2023-06-18 19: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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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년 유월 중순 지리산 촛대봉 아래로 펼쳐진 능선에 터를 잡은 작은재를 넘었다. 지리산 둘레길 16구간 출발지인 하동군 화개골에서 뗀 발걸음이 구례군 토지면에 다다른 셈이다. 작은재를 기점으로 오래전부터 양방향의 물산과 사람들이 넘나들며 생활을 섞어왔으니, 이곳은 영호남의 개념도 따로 없었다.

    작은재에서 기촌마을로 향하는 산 중턱 아래에 잘 조성된 밤나무 단지가 나타났다.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끝낸 나뭇단이 곳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고 머위는 밤나무가 내준 그늘에서 군락을 이루었다. 농원 가장자리에서 하얀 러닝셔츠만 걸친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르신께 다가가 인사를 했다. 산속에는 인적이 드물어 낯선 이들도 환대를 받는다. 건네준 의자에 앉으니 거름 냄새가 콧등을 간질거렸고 산 아래쪽에서 더운 바람이 올라왔다.

    어르신은 피아골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지금은 피비린내가 사라졌지만, 그곳은 빨치산의 본거지, 한국전쟁 전후 피로 얼룩진 곳이었다. 길손은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의 분위기를 물었다. “참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어르신 개인의 삶에 관심을 보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떠난 부산에서 타이어 펑크 전문점 점원으로, 나중엔 작은 가게를 차려 일만 했단다. 증표로 노동으로 단련된 두꺼운 팔뚝을 보여 주었다. 고향을 잊지 못해 환갑 무렵에 귀향, 산지를 구입해 밤농사를 지으면서 세월을 보낸다고 했다. 유일한 기쁨인 아들 이야기에는 신이 났다. 부산의 지역 일간지인 K 신문사에 부장으로 근무한다면서 효자 아들이라고 자랑했다.

    며칠 지나서 아들과 통화했다.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했다. 다시 엊그제 부친의 존함을 묻기 위해 두 번째 전화를 걸었다. 김의웅 어르신이 걸어온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시대의 역사를 만난다. 혈혈단신의 이방인이 감당하기에는 삶은 신산했고 안정된 여건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이란 젊은 날은 높은 파고를 넘어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잔잔한 항구에 다다르는 여정, 지금의 평화를 누리며 부디 행복하시기를.

    차재문(연강산업 대표이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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