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경남의 길] 김해시 장유 적항역~창원시 진해 보평역

경남의 길을 걷다 (8) 이야기가 있는 옛길 '자여도' (중)
겨울 이긴 봄 벗삼아 걸으며 ‘옛날 여행’
고개 너머 옛 읍성 한층 한층 쌓아가고…

  • 기사입력 : 2011-03-10 09:57:46
  •   
  •  
    답사팀이 평발고개를 넘어 웅천읍성으로 가는 농로를 걷고 있다./김승권기자/
     

    적항역 출발→ 율하천→ 율하리 장승백이→ 밤내재 들머리→ 밤내재→부산 지사동 너더리마을→ 율현(너더리 고개) 들머리→ 율현→ 용추폭포(수락암)→ 소사동과 마천동→ 부곡포→ 배응현 들머리→ 배응현(평발고개)→ 광천(곰내)→ 광천교→ 웅천읍성→ 동문 견룡루→ 웅천읍성 서문→ 보평역이 있던 서중동 도착


    자여도 두 번째 답사는 적항역(赤項驛)에서 보평역(報平驛)으로 잡았다. 적항역은 김해시 장유면 관동리(官洞里)에 있었으며, 보평역은 창원시 진해구 서중동 웅천읍성 근처다. 답사팀은 2월 24일 장유 율하리 장승백이에서 출발, 진해 웅천읍성으로 향하는 옛길을 걸었다.

    적항역은 김해부와 창원 자여역에서의 거리를 고려할 때 그 위치는 관동리 일원일 것으로 헤아려진다. 관동리라는 지명이 역관(驛館)에서 비롯하였으며 지금도 역마(역마을)라 불린다. 장유 산문리와 율하리를 경계짓는 반룡산 동쪽 끝자락이 적항현(손티고개)이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적항역은 김해도호부의 남쪽 30리, 동쪽으로 남역과 30리, 남쪽으로 웅천 보평역과 30리, 서쪽으로 창원 안민역과 30리, 북쪽으로 생법역과 20리 떨어져 있다. 대마 1필, 중마 2필, 복마(짐을 싣는 말) 5필, 역리 20인 등이 있다고 했다. 창원 안민역과는 지금의 상점령을 통했다.

    적항역에서 보평역으로 가는 길은 역을 나서서 밤내인 율천(栗川)을 건너고 너더리고개라 부르는 율천현을 넘어서 웅천땅으로 든다. 적항역 앞을 흐르는 율천은 화산과 굴암산에서 발원하여 조만강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율하천이다. 김해외국어고등학교에서 율하저수지 방면으로 1㎞를 못 미쳐 가면 장승백이 들머리가 나온다. 장승이 서 있던 마을을 장승백이라 하는데, 장승이 있던 곳은 적항역에서 5리(2㎞) 되는 곳이었을 게다. 예전에는 5리 간격으로 장승을 세워 이정표 구실과 마을 수호신 역할을 했다.

    답사팀이 장승백이서 너더리마을로 가는 고갯길인 밤내재를 걷고 있다.

    장승백이에서 너더리마을로 가는 고개가 밤내재다. 율하의 다른 이름이 밤내이다. 고갯길에는 논농사를 지은 흔적들이 쉽게 찾긴다. 30분가량 걸어 고개를 넘어서니 부산 강서구 지사동 부산지방과학산업단지가 나온다. 이렇게 경남땅 깊숙한 곳까지 부산이 들어와 있는 줄은 기자도 미처 몰랐다. 부산지방과학산업단지는 196만2000㎡로 1992년에 착공하여 2008년에 완공됐다. 인근에는 웅동-장유 간 국도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산업단지 끝머리 골짜기 쪽으로 너더리마을이 있고 지금도 서너 채가 남아 있다. 너더리마을은 마을 뒤의 산비탈에 있는 너덜바위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너덜은 풍화작용으로 쪼개진 바위 조각들이 쌓인 비탈을 말한다. 산업단지가 들어서기 전에는 아마 꽤 깊은 산골마을이었을 것이다. 길 주변에 두릅나무가 지천이다. 율하에서 밤내재를 넘어 산업단지까지는 가볍게 등산하기에 손색이 없다.

    굴암산과 마봉산 사이 V자로 보이는 골짜기가 너더리 고개다. 도로 공사로 곳곳이 파헤쳐져 고개 들머리를 잃었다. 답사안내를 맡은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은 안타까워했다. 옛길이 사라지는 현장이다. 들머리를 놓치고 한참을 헤맨 끝에 봉우리로 올라와 보니 다른 곳이었다. 낭패다. 옛 사람들이 밤에 재를 넘다가 뭔가에 홀려 길을 잃어버린 심정이 이러했을까. 경로를 너더리 고개로 다시 잡았다. 고갯마루에 서낭당 흔적이 남아 있다. 길손들은 이곳을 지나며 동티 나지 않게 돌을 하나씩 집어 올리고 절을 올리고 지났을 게다.



    이 고개를 내려서면 산간분지를 이룬 작은 골짝에 든다. 옛길은 해군 훈련장으로 들어가고 답사팀은 할 수 없이 철책을 따라 돌아야 한다. 군부대 입구가 용추고개다. 이를 벗어나면 진해 웅천땅이다. 소사동과 마천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까이에 용추폭포가 있다. 용숫골에서 흐르는 물이 마봉산과 범방산 사이의 골짜기에 있는 바위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지점에 웅덩이가 생겨 ‘용추’(龍湫: 용이 살고 있는 웅덩이·용소(龍沼)라고도 한다)라는 폭포가 되었다. 물줄기가 묘하게 세 줄기로 떨어져 서쪽 줄기가 마르면 전라도가 가물고, 가운데 줄기가 마르면 충청도가 가물고, 동쪽 줄기가 마르면 경상도 지방이 가문다고 전해진다.

    용추에서 남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예전에는 낙수원(落水院:숙박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웅천에서 김해로 향하던 길손이 쉬어갔을 것이다. 바닷물이 이곳까지 밀려 왔든지 마천 여러 곳에서 삼국시대의 조개더미가 발견되었다.

    겨울을 이긴 봄이 들을 찾아왔다. 이른 논갈이가 한창이다. 답사팀은 근처 식당에서 때늦은 점심으로 숨을 돌린다. 쌈밥정식인데 정갈했다. 마천시장을 지나면 김달진문학관까지는 700m 거리다. 문학관 일대에 김씨박물관 등 볼거리가 많다. 국도 2호선을 따라 걸으니 길가에 3·1 독립운동기념비가 새로 조성됐다. 기미년 4월 3일 마천동 냇가에서 주기용 선생을 비롯한 이 고장 3000여 애국지사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2009년 1월에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지금은 이곳을 웅동이라 하는데, 옛 웅천현의 동쪽이라 그리 부른다. 마천주물공단 서쪽으로 길을 잡아 웅동을 벗어나면서 산길을 오르면 배응현(裵應峴·평발고개)에 닿는다. 이 고개와 이어지는 자마산에는 청동기시대의 돌도끼와 움집터가 나왔다. 성터도 발굴됐다.
    답사팀이 진해 광천교에서 시루를 엎어놓은 듯한 시루봉을 올려보고 있다.

    평발고개와 웅천읍성까지는 옛길이 남아 농로로 쓰이고 있다. 진해농업기술센터를 지나면 동천(東川)이라 불리는 광천(廣川)에 닿는다. ‘광천교’라 새긴 빗돌이 근처에 남아 있다. 이 하천은 웅산(熊山)에서 내려오고, 웅산 꼭대기에는 시루를 엎어놓은 듯하다 하여 시루봉이 있고, 진해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광천교를 지나 조그만 더 가면 웅천읍성의 동문이 나온다. 동문으로 들어 서문으로 나서면 그 바깥에 보평역이 있었다. 웅천읍성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보평역은 조선시대에 신설된 역이다. 조선후기 편찬된 여지도서에 보평역은 현 남문밖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쪽으로 창원 안민역과 30리, 동쪽으로 김해 적항역과 30리, 중마 2필, 복마 5필, 역리 30인 등이 있었다고 나온다. 최 원장은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등에서 역의 위치가 달라 좀 더 조사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보평역의 역인(驛人)이 제포왜관의 왜상과 결탁해 국가안보에 저해되는 행위를 일삼아 폐지 주청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물물교역을 위해 역을 유지키로 결론지은 지 불과 한 해 뒤인 1510년 4월에 난리가 났다.

    복원 공사가 한창인 웅천읍성.

    울산 염포와 부산의 부산포, 진해의 제포의 왜인들이 난리를 일으킨 것이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이 개혁정치를 표방하면서 면세혜택이 사라지고 거주자도 정해진 인원을 넘지 못하게 하는 등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이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꾀한 것이다. 무장왜인 4000~5000명이 웅천읍성을 포위하고 민가를 불살랐다. 부산포 첨사가 전사하고 제포진 첨사가 납치되었다. 당시 실록에는 웅천읍성의 동문이 불탔고, 270여 명의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민가 796채가 불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읍성의 주춧돌이 사가의 담벼락이 되었다.

    웅천읍성은 세종실록과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따르면 1434년에 착공하여 이듬해 완공되었다. 웅천읍성은 삼포왜란과 임진왜란 등으로 여러 차례 격전을 치렀다. 이즈음에 읍성 남쪽의 남산과 안골포, 명동, 자마산 등에 왜성이 축조되었다. 조선 전기와 중기를 거치면서 왜란을 겪는 동안 수차례 점령당하면서 시설물의 훼손과 복구가 거듭되었다. 1895년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읍성의 기능은 상실되고 보평역도 폐역되었다.

    ★ 적항역과 보평역 주변 옛길

    ◇보평역에서 안민역 오가는 길

    보평역 터 출발→ 서중동 효자거리 비석무리→ 소현→ 원포동→ 대현→ 팔현(주씨 유허비)→ 태봉→ 덕산동→ 자은동→석전동→ 안민고개 들머리→ 안민고개→배씨 정려비→ 안민역이 있던 안민동 도착

    ◇안민역에서 적항역 오가는 길

    안민역 터 출발→ 곰절 들머리→ 남산리 선돌→ 불모산동→ 삼정자동 마애불→ 상점령 들머리→ 농바위→ 상점령→ 대청계곡 상점마을→ 장유암 들머리→ 아랫상점→ 윗덕정 마을→ 적항역이 있던 관동리 관동마을 도착

    ◇생법역에서 적항역 오가는 길

    생법역 출발→ 윤씨 정려비와 오규영 송덕비→ 냉정고개 들머리→ 냉정고개→ 부곡리 삼거리→ 부곡리 냉정원 터→ 무계리→ 적항현(손티고개)→ 관동유적전시관 → 적항역이 있던 관동리 관동마을 도착

    글=이학수기자 leehs@knnews.co.kr

    사진=김승권기자 skkim@knnews.co.kr

    답사 동행=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장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학수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